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철선(徹膳)과 감선(減膳)을 혼용하여 쓰기도 했다. 철선은 다른 말로 각선(却膳)이라고도 한다. 각선은 수라상이 들어왔지만 물리치는 행위를 말한다. 각선을 표시하는 방법은 왕이 내시로 하여금 편전(便殿)의 앞문인 합문(閤門)을 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찬선(饌膳)이 편전으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신하들은 왕이 철선 혹은 각선을 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비해 철선은 미리 주원(廚院)에 알려서 음식을 들이지 않든지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라고 명을 내려서 행해졌다. 철선은 감선과 마찬가지로 혼용되었다. 곧 철선은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의 양이나 가짓수를 줄이는 일과 하루에 5번 받는 음식의 횟수를 줄이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왕이 철선을 결정하는 이유 중 가장 으뜸에 드는 것은 자연재해이다. 가뭄이나 홍수, 갑작스런 날씨 변화, 혜성이 나타나거나 벼락이 떨어지는 등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왕은 철선을 하였다. 철선은 자연재해나 자연의 이상한 일로 인해 생겨난 백성들의 고통을 두고 왕이 스스로 덕이 없어서 일어난 것이라고 여겨서 반성의 모습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심지어 왕의 요구가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철선이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철선이라 부르지 않고 각선이라고 했다.
[내용 및 특징]
당나라 고종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철선을 감행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의 철선은 아예 식사를 하지 않는 각선이다. 각선을 통해서 왕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했고, 신하들은 왕의 수명이 곧 왕조의 지속이기 때문에 가장 무서워하였다. 왕이 철선이나 각선을 하면 신하들은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철선 혹은 각선을 멈추라는 요청을 하였다. 왕은 입맛이 없어 각선을 행하기도 했다.
[변천]
인종은 선왕의 상장례를 치르고 건강이 좋지 않고 입맛이 없어 각선을 한 적이 있다. 신하들이 작은 예법을 지키면서 병을 숨기고 각선을 하는 행위가 극에 달했다고 걱정을 하였다. 여기에서의 각선은 감선이다. 그래서 종친이나 인척 중의 나이 든 신하가 사옹원(司饔院)의 제조(提調)가 되어 왕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건강을 챙기겠다고 하였다. 인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인종은 건강을 잃고 사망하였다.
철선과 각선을 가장 많이 한 왕은 영조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영조가 철선보다 각선을 훨씬 많이 행하였다. 영조는 재임 초기부터 자신의 반대파 신하들을 파직시키면서 당파를 없애려고 왕이 각선을 하는데도 중신들이 자신을 속였다고 했다[『영조실록』 13년 8월 11일]. 심지어 각선을 4일 동안이나 하기도 했다[『영조실록』 13년 8월 11일]. 이에 신하들이 한밤중에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미봉책을 쓰지 말라는 신하도 있었다. 왕이 아무리 해도 당파가 없어지지 않으며 각선을 해도 당파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근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상소를 올렸다[『영조실록』 13년 10월 14일]. 영조의 각선은 3번의 수라상뿐만 아니라, 새벽과 밤의 죽(粥)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약제나 삼다(蔘茶)도 거부하였다. 이를 각약(却藥)이라고 한다. 영조는 내의원들의 간청에 못 이겨 밤에 죽과 다음(茶飮)은 먹기도 했지만, 곧장 후회하여 그것은 각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자치통감(資治通鑒)』
■ 함규진, 「조선 역대 왕들의 감선(減膳): 그 정치적 함의」, 『한국학연구』34,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