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당나라 태종이 매년 중죄인을 의결할 때 음악을 멈추고 소선(素膳)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즉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왕은 채식으로 조리한 음식만을 차린 상차림을 받았다. 이런 관념이 한반도에도 전해져 고구려 보장왕과 고려 공민왕은 중죄인을 벌할 때 소선을 차리도록 했다. 『의례(儀禮)』「상복(喪服)」에서는 시신의 염이 끝나면 상주는 바깥에 머물면서 채소와 과일을 먹을 수 있고 반찬은 소식(素食)으로 하고 곡을 끊이지 않게 한다고 했다.
이런 관념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선왕, 왕실의 친인척, 아끼는 신하 등이 죽으면 소선을 차리도록 명하였다. 왕과 왕후의 제삿날과 같은 국기일(國忌日)이 되면 조정의 신하들도 모두 이틀간 소선을 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소선으로만 식사를 하면 신하들은 왕의 건강을 염려하여 소선 거두기를 상소하였다.
[내용 및 특징]
단종 때 왕실에서 소선의 예제를 정하였다. 졸곡(卒哭) 전 연향에서 왕은 소선의 상을 받고, 졸곡 뒤에는 육선(肉膳)을 차리고, 사신은 졸곡 전후에 육고기를 쓰고, 종친과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연회도 이와 같다고 했다[『단종실록』 즉위 7월 26일 3번째기사]. 소선의 상차림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채소국과 나물 그리고 침채 위주의 상차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철종·순종을 제외하면 모든 왕이 소선을 행한 것으로 나온다. 태조는 아끼는 신하가 죽자 소선을 행하였다. 모든 왕이 소선을 통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선왕의 기제사 날에도 소선을 행했다.
연산군은 선왕 성종의 기일 때 육고기를 올리지 않고 소선을 올린 사옹원의 관원을 죄인으로 다루어 문초를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2월 23일]. 선왕 성종에 대한 반발심에서 나온 결과였다.
소선을 강조하다 보니 불교식(佛敎食)과 닮아 갔다. 숙종 때 홍현보(洪鉉輔)는 기신제(忌辰祭)와 오명일(五名日) 절사(節祀)의 선품(饍品)을 단지 유밀과와 두부탕만으로 지내는데 이것은 불교의 유습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소선의 경비 중 반 이상이 유밀과를 만드는 데 필요한 꿀과 밀가루를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기일제에서도 소선을 하지 말고 육선을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숙종실록』 45년 4월 30일].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조는 소선을 엄격하게 지켰다. 정조는 중국의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삼황(三皇)과 역대 선왕들의 기일에 반드시 소선을 들이게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대왕 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