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은 왕세자 교육을 위해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학식과 덕망을 갖춘 학자를 서연관(書筵官)에 임명하여 왕세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서연관 중 사·부·이사(貳師)는 1품관으로 의정부(議政府)의 정승(政丞)이나 찬성(贊成)이 겸직하여 세자 교육을 감독하였고, 빈객과 부빈객(副賓客)은 2품직의 겸관으로 강의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 의식은 왕세자가 사·부·빈객을 처음 만나 스승의 예를 갖추고 인사하는 것으로,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어 이후 계속 유지되었던 의례이다.
[연원 및 변천]
왕세자가 사·부·빈객을 만나는 의식이 처음 제정된 것은 1431년(세종 13)이며[『세종실록』 13년 6월 4일], 이때의 의주가 수정·보완되어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조선초기 세자와 사·부의 상견(相見) 사례로는 1455년(세조 1)에 자선당(資善堂)에서 세자와 사·부의 상견례를 거행한 것이 있다[『세조실록』 1년 7월 29일].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에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과 사·부의 상견례가 있었는데, 이는 전란 때문에 미뤄졌던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선조실록』 26년 2월 15일]. 한편 1615년(광해군 7)에는 세자와 사·부·빈객의 상견례 때 궁관(宮官)들의 복색에 대해 논의했는데, 왕세자가 규정된 복장을 갖추었을 때는 공복(公服)을 입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예관(禮官)이 따로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했다.[『광해군일기』 7년 10월 10일][『광해군일기』 7년 10월 17일]
1754년(영조 30) 2월에 영조는 세자와 사·부·빈객의 상견례가 폐지되고 있던 당시 상황을 심각한 문제로 거론하면서, 근일 상견례를 행하지 않은 빈객들을 모두 중추(重推)하고 이후로는 서연에 번갈아 입대(入對)하여 감히 빠지지 못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영조실록』 30년 2월 24일]. 한편 정조대에는 1785년(정조 9)에 공묵합(恭默閤)에서 왕세자와 사·부·빈객의 상견례를 거행하고 서연관에게 특전을 베풀었다. 이때 정조는 서연관으로 참여한 보덕(輔德) 정술조(鄭述祚)가 자신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권면(勸勉)·계도(啓導)한 공이 컸는데, 이제 또 서연에 등대(登對)하였으니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라고 치하하면서 그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키고, 나머지 서연관들도 모두 승진시켰다[『정조실록』 9년 9월 9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된 왕세자여사부빈객상견의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사 당일 액정서(掖庭署)에서 왕세자의 배위(拜位)와 사·부·이사·빈객의 배위를 설치한다. 궁관이 각각 의복을 갖추고, 익위사(翊衛司)는 의장과 시위를 준비한다. 사·부·이사·빈객이 서당에 모여 공복을 갖추어 입는다. 필선(弼善)이 내엄(內嚴)을 알리면 보덕(輔德) 이하 관원과 익위(翊衛) 이하, 사·부·이사·빈객 등이 각자의 자리에 선다. 필선이 바깥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면 왕세자가 동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사·부·이사·빈객은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사·부·이사가 먼저 자리에 나아가고 왕세자가 그다음 자리로 나아간다. 왕세자가 머리를 조아려 2번 절하면, 사·부·이사·빈객도 머리를 조아려 2번 절한다. 예가 끝나면 사·부·이사·빈객이 계단으로 내려가고 왕세자는 동쪽 계단으로 내려간다. 사·부·이사·빈객이 문으로 나가고 왕세자도 안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