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동아시아에서는 인장에 사용하는 용어와 형태 및 재질을 통해 신분을 구분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주로 한대(漢代)로부터 제도화한 것으로 보인다. 『한관의(漢官儀)』에는 황제·황후로부터 제후·열후를 비롯하여 고위관직자의 인장제도를 정리해 놓았다. 이를 보면 황제나 제후의 인장 용어는 ‘새(璽)’, 열후와 어사대부 등은 ‘장(章)’, 그 이하는 ‘인(印)’으로 규정하였다. 손잡이의 형태도 최고 권력자는 용이나 호랑이로 제작하고 그 아래는 낙타, 거북 등으로 구분하였다. 재질에서도 옥→황금→금→은→동 순으로 서열화하여 신분을 나타냈다. 조선시대 어보의 재질은 금, 은, 옥, 백철 등이 있다. 은으로 제작한 인장을 흔히 은인이라 하는데, 어보의 경우 최상품질의 천은(天銀)으로 제작하였다. 현존하는 어보 가운데 은으로 제작된 경우는 2건의 책봉인을 제외하면 모두 특수한 사안에 제작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책봉보인의 경우도 중국의 제도에 따라 용어와 형태, 재질 면에서 신분의 차등을 두어 제작하였다. 우선 용어 면에서 왕비의 경우 ‘보’로 하고, 이하 왕세자로부터 왕세손빈까지는 모두 ‘인’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왕비 책봉보의 명칭은 ‘왕비지보(王妃之寶)’로 하고 이하의 경우 모두 ‘왕세자인(王世子印)’과 같이 책봉명에 ‘인’ 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재질에서도 왕비의 경우 금으로, 왕세자 이하는 대부분 옥으로 제작하였으며, 간혹 은으로 제작한 특수한 사례가 있다. 은으로 제작한 경우 흔히 ‘은인’으로 부른다.
어보의 재질은 금, 은, 옥, 백철이 있다. 우선 금보는 순금으로 만든 사례는 없다. 순금은 재질이 물러 보문이 쉽게 손상되기도 하지만 재용 면에서도 왕실의 부담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금, 수은, 은, 동을 섞어 혼합, 주조하여 도금하거나 천은에 도금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어보를 은으로 만든 사례는 모두 6과인데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5과이다. 그중 유물이 전하지 않는 사례로 1465년(세조 11) 덕종비(德宗妃) 소혜왕후(昭惠王后)에게 특별히 내린 효부수빈인(孝婦粹嬪印)이 있다. 소혜왕후는 1455년(세조 1) 세자빈에 간택되어 정빈(貞嬪)에 책봉되었으나 이후 세자가 횡사하였다. 10년이 지난 1465년(세조 11) 세조는 정빈을 고쳐 수빈(粹嬪)으로 삼고 특별히 ‘효부(孝婦)’라는 명칭을 더해 은인을 다시 만들어 주었다[『세조실록』 11년 7월 27일].
특별한 사례의 은제 어보로 1776년(영조 52)에 정조에게 내린 ‘효손 팔십삼서(孝孫 八十三書)’가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영조 자신에 대한 효심에 감동하여 영조가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내린 은인이다[『영조실록』 52년 2월 9일]. 83세 영조의 친필을 새긴 유일한 어필어보이며, 당시 왕세손에게 내린 유서(諭書)와 함께 현전한다.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진종(眞宗)을 위해 만든 ‘효장승통세자지인(孝章承統世子之印)’과 진종비(眞宗妃) 효순왕후(孝純王后)를 위해 만든 ‘효순승통현빈지인(孝純承統賢嬪之印)’도 은으로 제작된 어보이다[『영조실록』 52년 1월 27일]. 양자로서 왕위에 오를 정조를 위해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자 영조의 명으로 만든 특별한 은인이다. 각각 효장(孝章)과 효순(孝純)의 시호 뒤에 종법상의 계통을 잇는다는 의미인 ‘승통(承統)’ 2글자를 특별히 추가하여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