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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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隸書)

서지사항
항목명예서(隸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서체(書體), 자체(字體)
하위어고예(古隸), 팔분(八分)
관련어전서(篆書),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중국 진대(秦代)에 발생하여 한대(漢代)에 완성된 한자체(漢字體)의 하나.

[개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중원을 통일한 이후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가운데 이른바 ‘거동궤서동문(車同軌書同文)’ 즉, ‘온 천하의 수레는 바퀴의 폭이 같고, 같은 종류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천명은 새로운 서체의 발생을 가져왔다. 시황제는 승상(丞相) 이사(李斯)에게 새로운 서체를 개발할 것을 명하여 진나라의 공식 서체인 소전(小篆)이 생겨났다. 소전은 자형이 정제(整齊)하여 아름다우나 획이 복잡할 뿐 아니라 서사(書寫)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으므로 사용하는 데 불편하였다. 이에 소전의 복잡한 형태를 간소화하고, 둥근 형태를 모나게 하며, 곡선을 직선으로 변형하여 일용에 편리한 새로운 서체인 예서(隷書)가 나오게 되었다.

예서는 진나라의 정막(程邈)이란 사람이 죄를 짓고 운양(雲陽)의 옥사(獄舍)에서 10년의 고사(苦思) 끝에 3,000자를 만들어 시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시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즉시 정막을 사면한 후에 어사(御史)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예서는 사무용 문자라 하여 신분이 낮은 도예(徒隸), 즉 예인(隸人)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좌서(佐書)’라고도 하는데 이전의 공식 서체인 전서(篆書)의 보조 서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초창기의 예서, 즉 진나라의 예서는 국가의 공식 서체가 아니었으므로 영구히 전할 목적의 금석(金石), 비각(碑刻) 등에는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남겨지지 않았다. 이후 중원에 한(漢)나라가 들어서면서 서사에 편리한 예서가 전서를 대신하여 국가 공식 서체로 자리 잡았고, 현전하는 한대 비각 등도 대부분 예서로 전해진다.

[내용 및 특징]
예서는 크게 ‘고예(古隸’)와 ‘팔분(八分)’으로 나뉜다. 고예는 파책(波磔) 즉, 옆으로 긋는 획의 종필을 오른쪽으로 흐르게 뻗어 쓰는 필법이 없고 전서의 기미를 포함하는 서체이며, 파책이 분명한 서체는 ‘팔분’으로 분류한다. 고예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서체인 반면, 팔분은 장식적이며 의례적인 성격을 띤다.

팔분의 명칭에는 여러 기원설이 있다. 첫째, ‘팔자분배설(八字分背說)’로, 낱글자의 형태가 ‘八’ 자와 같이 좌우로 등지는 형상에서 발생하였다는 설이다. 둘째, 예서의 필법이 8푼, 전서의 필법이 2푼 정도의 서체라는 점에 착안하여 ‘팔분’으로 명명하였다는 설이다. 셋째, 팔분을 처음 만들었다고 전하는 진나라의 왕차중(王次仲)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그 크기가 8푼이었다는 설이 있다.

예서는 진나라 때에 처음 발생하였지만 이후 후한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쓰인 서체이다. 이후로 당(唐) 현종(玄宗) 때에 잠시 부각되기도 하였으나 해서(楷書)의 필획이 가미되었고, 두툼하고 대칭적인 서체로 변모하여 한예(漢隸)의 원형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이후 청대(淸代) 금석·고증학의 흥기에 따른 비학(碑學)의 대두로 한예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부각되었고, 많은 서가(書家)의 관심 속에서 예서의 원형이 재현되기도 하였다.

‘예서’의 명칭은 시대와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송대(宋代)의 홍괄(洪适)은 『예석(隸釋)』에서 고예의 법은 이미 서한(西漢)말에 종결되었다고 보았는데, 일반적으로 ‘고예’는 진과 전한(前漢)의 예서를, ‘한예’와 ‘팔분’은 후한의 예서를 지칭한다. 이후 당대의 문헌에는 한대의 예서를 ‘팔분’이란 용어로 고착화하는 대신 ‘예서’는 팔분에서 좀 더 정형화된 서체, 즉 해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청(淸)의 유희재(劉熙載)는 『예개(藝槪)』에서 “해서가 나온 이후에 예서는 부득이 팔분이라 명명하였다.”고 하여 중국에서도 팔분이 예서의 대표 명칭으로 쓰였음을 볼 수 있다. 한국의 고대 문헌에서도 예서는 해서를 뜻하는 용어로 자주 쓰였다. 일례로 통일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예서와 행초(行草)가 모두 묘경(妙境)에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글에서의 예서는 바로 해서를 뜻한다. 실제 김생의 예서 필적은 전하는 예가 없다. 또한 『고려사』의 열전 곳곳에 보이는 ‘예서’도 실제로는 ‘해서’의 의미로 쓰인 경우가 많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예서에 뛰어난 인물들 가운데 뛰어난 해서 필적을 남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경우를 살펴보면 ‘예서’는 ‘해서’와 ‘예서’를 뜻하는 경우가 혼용됨을 볼 수 있다. 조선전기 강희안(姜希顔)의 졸기를 보면, “전서와 예서와 팔분에도 모두 정통한 경지를 이루었다.” 하였고, 강석덕(姜碩德)의 졸기에서도 “전서·예서·팔분의 글씨가 모두 정묘(精妙)하였다.”고 하여 예서와 팔분을 서로 다른 서체로 기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 내용에 보이는 예서는 바로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예와 같이 해서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 김정희의 졸기에는 “금석문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해서·전서·예서에서 참다운 경지(境地)를 신기하게 깨달았다.”고 하여[『철종실록』 7년 10월 10일] 해서와 예서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한국 고대로부터 근대까지의 문헌에서 예서에 대한 지칭은 해서와 예서의 양면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의 고문헌에서 ‘팔분’으로 지칭하는 용어는 현재의 예서의 의미로 확정할 수 있다. 그 사례로, 고려말에서 조선전기에 활동한 이로 예서를 잘 썼던 권중화(權仲和)의 졸기에는 “대전(大篆)과 팔분을 잘 썼다.”고 하였다[『태종실록』 8년 11월 23일]. 또한 17세기에 예서를 잘 쓰기로 유명했던 김수증(金壽增)의 졸기를 보면, “전서·주서(籒書)·팔분을 잘하여 공사간(公私間)의 금석문을 많이 썼다.”고 하였다[『숙종실록』 27년 3월 4일].

한국 예서의 흐름을 개괄하면,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비」와 「호우명」 정도가 대표적이며, 고려말에는 송대 유구(劉球)의 『예운(隸韻)』과 같은 자서(字書)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예서는 이체자를 포함하여 특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그 근원이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 16세기에 예서를 쓴 사례로 이황(李滉)과 허성(許筬) 등이 대표적이다. 이황은 그의 문집에서 『예운』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였고, 그의 예서 필적 또한 자형과 필획에서 상당 부분 이를 근거로 하였다. 한편 허성의 예서는 동시대인 명대(明代)의 예서를 수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17세기에는 안동김씨와 은진송씨 가문에서 예서가 많이 쓰였다. 17세기 초반 김광현(金光炫) 부자의 예서에 보이는 명대의 영향은 송준길(宋浚吉) 부자로 이어졌으며, 김수증에 이르러서는 해서의 필법이 가미되는 경향을 보였다.

18세기에는 한예 수용의 예서풍을 살펴볼 수 있다. 금석문에 관심이 많았던 여러 수장가가 중국으로부터 한비(漢碑)의 탁본을 입수하였고, 이러한 자료들은 그들과 교유가 깊었던 서가들에게 학습 자료로 제공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수(金光遂), 이광사(李匡師), 이윤영(李胤永), 이인상(李麟祥) 등이다. 이런 바탕 위에 19세기 초 유한지(兪漢芝)와 같은 예서 전문서가가 출현하였다. 유한지는 당예(唐隸)로부터 한비의 여러 자료를 두루 수용하여 앞 세대보다 진전된 예서를 구사하였다. 또한 김정희는 후한 예서는 물론 예서의 근원이 되는 서한 예서까지 관심을 확대시켜 자신만의 예서풍을 정립하였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새로운 예서 자료가 많이 발굴되어 서가들에게 활용되었다. 김정희의 예서는 동시대 청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전에 근거한 파격미가 있었다.

[참고문헌]
■ 梁披雲 主編, 『中國書法大辭典』, 미술문화원 영인본, 1985.
■ 정태희 編著, 『中國書藝의 理解』, 원광대학교출판국, 1996.
■ 이희순, 「朝鮮時代 隸書風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집필자] 성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