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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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인(達達人)

서지사항
항목명달달인(達達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몽골[蒙古], 몽골족[蒙古族]
하위어달달구자(達達朐子), 달달마(達達馬), 달달병(達達兵), 해서달달(海西達達), 삼위달달(三衛達達), 달달국(達達國), 탈탈불화(脫脫不花), 패래(孛來)
동의어타타르(Tatar)인, 달단인(韃靼人), 달노(達奴), 달적(達賊), 달자(達子)
관련어오이라트(Oyirad), 오르도스(Ordos), 가한(可汗), 정통제(正統帝), 토목보(土木堡)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원나라 멸망 이후 몽골족을 대표하던 달달 부족의 구성원 또는 몽골족 전체의 별칭.

[개설]
원나라 멸망 후 북원(北元) 세력의 잔존 세력과 나머지 몽골인 집단 및 변두리에서 기회를 엿보던 몽골인 유력자들이 몽골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 결과 몽골고원 동쪽과 요동 지역에 거주하던 달단(韃靼) 부족, 즉 달달(達達) 부족이 패권을 차지하였다. 달달은 몽골고원 서쪽에 거주하던 오이라트 부족에게 패권을 잃기도 하였지만 다시 패권을 되찾았는데, 달달은 원래의 근거지였던 몽골고원 동쪽과 요동 지역을 떠나 황하 상류인 오르도스 지역으로 이동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처음 달달인들이 거주하던 몽골고원 동쪽과 요동 지역은 물론 그들이 이주해간 오르도스 지역 역시 달달로 인식됨으로써 몽골고원 전체가 달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내용 및 특징]
원나라 멸망 후 벌인 몽골의 주도권 쟁탈전 끝에 달단 부족, 즉 달달 부족의 곤첩목아(坤帖木兒)가 몽골의 통치자인 가한(可汗)이 됨으로써, 이후 오랫동안 중국에서는 몽골의 호칭으로 달달을 쓰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몽골인을 달달인[『태조실록』 총서 81번째기사] 또는 달자(達子)·달적(達賊) 등으로 불렀으며, 몽골의 개는 달달구자(達達朐子), 몽골의 말은 달달마(達達馬), 몽골의 병사는 달달병(達達兵)이라고 하였다.

달달은 달리 타타르라고도 하였는데, 달달인들은 주로 몽골고원의 동쪽에 거주하였으며 몽골고원의 서쪽에 거주하던 오이라트 부족과 대립하였다. 달달의 가한이 된 본아실리(本雅失里)는 몽골의 통일을 노리며 15세기 초에 오이라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여구하(臚朐河) 유역으로 피신하였다.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는 달달을 회유하기 위하여 사자를 파견하였으나 본아실리는 이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사자를 살해하였다. 이에 격노한 영락제는 1409년(태종 9) 구복(丘福)에게 100,000병력을 이끌고 원정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였다. 이에 영락제는 직접 500,000대군을 이끌고 달달 원정에 나섰다. 달달의 가한 본아실리는 영락제의 대군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도중 오이라트에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세력이 약화된 달달은 영락제에게 사죄하는 사자를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평화 관계를 성립하였다.

반면 세력이 강해진 오이라트는 달달을 공격하면서 명나라의 변경도 침략하였다. 이에 영락제는 다시 500,000대군을 이끌고 오이라트를 정벌하였지만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세력을 회복한 달달은 명나라의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영락제는 1422년(세종 4)에 또다시 달달 원정에 올랐고 이후 2년 연속하여 달달을 공격하였지만 뚜렷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귀환 도중 병사하였다. 이후로 명나라가 달달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을 하는 일은 사라졌다. 명나라 영락제의 대규모 침략을 받으면서도 달달과 오이라트의 패권경쟁은 지속되었는데, 영락제의 집중 공격을 받은 쪽이 달달이었으므로 오이라트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고, 그 결과 명나라의 군사적 개입이 사라진 후 오이라트가 달달을 제압하고 몽골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렇게 몽골을 통일한 오이라트의 가한 탈탈불화(脫脫不花)는 자신의 즉위를 알리는 몽골문자로 된 ‘몽골황제칙서’를 조선에 보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4년 5월 4일]. 당시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 칙서를 접수하지 않고 명나라에 알렸는데, 명나라와 조선에서는 달달과 오이라트를 구분하지 않고 오이라트 역시 달달이라고 불렀다.

[변천]
몽골을 통일한 오이라트는 명나라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경제적 요구를 하였고 명나라는 반발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1449년(세종 31)에 오이라트가 대거 남침하자, 명나라의 정통제(正統帝)는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50만(500,000)대군을 이끌고 직접 정벌 길에 올랐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포로로 잡혔다. 이렇게 군사력으로 명나라를 압도할 정도로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오이라트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1455년(세조 원년)에 오이라트의 지도자가 피살되었다. 이 틈을 타고 달달의 지도자 패래(孛來)는 오이라트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그 결과 오이라트는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대신 달달이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강성해진 달달은 원래의 근거지였던 몽골고원 동쪽과 요동 지역을 떠나 황하 상류인 오르도스 지역으로 이동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처음 달달인들이 거주하던 몽골고원 동쪽과 요동 지역은 물론 그들이 이주해 간 오르도스 지역 역시 달달로 인식됨으로써 몽골고원 전체가 달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김구진, 「여진과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박원호, 「15세기 동아시아 정세」,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박원호, 「명과의 관계」, 『한국사』 22,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