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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1732년(영조 8) 경상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에 따라 함경도의 진휼을 위하여 경상도 영일 지역에 설립한 진휼창을 일컬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함경도는 토질이 척박하여 곡물 생산량이 다른 도에 비하여 적었으며, 중앙에 상납해야 할 전세곡도 도내의 관창에 군자곡으로 비축해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 중앙에서 부세를 줄여 주더라도 함경도 도민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되지 못하였다. 함경도 도민에게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진휼방식은 다른 도에서 곡물을 이전해 오는 것이었다.
17세기 초까지는 보통 강원도에서 해로를 통해 진자(賑資)를 이송해 주었으며, 강원도의 작황이 좋지 않을 때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강원도에 곡식을 보내 주면 이것을 다시 함경도에 옮겨 주었다. 그러나 강원도 역시 토질이나 작황면에서 불시에 진휼곡을 잇대기 어려웠기 때문에 17세기 후반부터는 전결수가 많고 작황이 좋은 경상도에서 주로 진휼곡을 이전해 주었다. 문제는 기근이 들었을 때 진휼곡을 갑자기 마련해 올리는 조치는 경상도 도민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상도 도민의 민폐를 줄여 주면서 북관에 진휼곡을 안정적으로 이전해 주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고, 동해안에 진휼창고를 설립하는 안이 영조대 초반에 제기되었다. 이에 1732년에 설치된 포항창은 함경도 원산·고원·함흥 3곳에 설치했던 교제창과 더불어 함경도에 진휼곡을 이전하기 위하여 설치된 창고로 19세기 말까지 운영되었다.
[조직 및 역할]
포항창은 처음에는 조운의 요충지인 포항리에 포항창진(浦項倉鎭)으로 설치되어 창과 진의 역할을 함께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포항창에는 별장 외에 군관 7명, 이서 3명, 지인(知人) 3명, 사령(使令) 3명, 창속 30명, 수졸(守卒) 3명을 두었다. 그러나 포항창진은 운영 과정에서 군사적 기능보다 진휼곡을 이전하는 경제적 기능이 강조되었다. 포항창진은 동해안 일대의 환곡을 비축하여 함경도 산간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한편, 필요에 따라 전라도와 강원도 등에도 진휼곡을 이송하는 역할을 하였다. 포항창에는 평소 20,000석가량의 곡식을 조적(糶糴)하였으며, 최대 50,000석까지 보관이 가능하였다. 포항창에 속한 조운선도 14척에 달하였다.
포항창이 이처럼 북관에 진휼곡을 이전하는 요충지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포항항이 전라도나 함경도를 이어 주는 중간 기착점이면서, 곡창지대가 많은 경상도의 농작물을 수집하는 데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변천]
포항창은 다른 도에 비하여 전결수가 많고 농업 생산량이 뛰어난 경상도의 곡식을 할애하여 유사시 함경도에 진휼곡을 이전할 수 있도록 동해안로에 설립된 진휼창고였다. 포항창이 설립된 이후 불시에 경상도 각 읍의 곡식을 갹출하여 연안까지 옮겨 와야 하는 폐단이 얼마간 해소되었다.
포항창은 이후 1766년(영조 42)에 영남의 좌제민창(左濟民倉)에 이속되었지만, 포항창의 설치와 운영은 동해안 일대의 물류 유통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포항창 설치를 전후로 영일현과 인근 지역에 부조장(扶助場) 등 다수의 장시가 개설되어 영일만을 중심으로 한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조선후기 관창의 운영은 재정 물류의 집적과 이동을 유인하는 것이었기에, 지역 간 상업유통경제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 정형지, 「조선후기 浦項倉의 設置와 運營」, 『오산전문대학산업기술연구소보』 3, 오산대학 산업기술연구소, 1997.
■ 최주희, 「18세기 후반 官倉運營의 변화와 私設倉庫의 등장」, 『녹우연구논집』 41, 이화여자대학교, 2002.
■ 김형수, 「조선후기 경상도 동해안 지역의 상품유통-浦項지역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