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성균관 소속의 종3품 관직으로, 1401년(태종 1) 설치 당시 정원은 2명이었다가 조선후기에 1명으로 줄었다. 사성(司成)은 성균관 소속 유생들의 교육을 주관하던 직책이었으나 그 외에 종학(宗學) 등의 관직을 겸하거나 각종 다른 업무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고종 연간에 성균관 제도가 개편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담당 직무]
사성은 성균관 소속의 전임 관직으로, 성균관에서 대사성을 보좌하여 유생들의 교육을 주관하였다. 사성은 이 밖에도 원자(元子)나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때 박사(博士)로 차출되어 제자가 스승에 예물을 올리는 속수(束脩)의 예를 주관하거나[『태종실록』 3년 4월 8일], 경차관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민원을 파악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2월 21일]. 또한 1430년(세종 12) 3월에 종친의 교육을 위해 종학을 설치하면서 성균관 관원으로 박사를 겸해 종학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2년 3월 6일].
[변천]
사성은 고려말 성균관에 소속된 관직이었는데,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관제 반포 당시에 좨주로 개칭되어 설치되었다. 좨주는 종3품으로 정원은 1명이었다. 이후 1401년(태종 1) 7월 13일 관제 개편 때 좨주가 다시 사성으로 개칭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경국대전』에서는 정원이 2명이었으나, 조선후기 영조대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1명이 감축되어 1명으로 규정되었다. 다른 관청 소속 관원 중에 뛰어난 학덕이 있다고 칭해지는 자가 이 직을 겸하여 겸사성(兼司成)으로 유생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단종실록』 2년 8월 28일]. 사성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성균관 제도가 개편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