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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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仕日)

서지사항
항목명사일(仕日)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고공사(考功司)
분야정치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관원이 특정 관직에서 일한 근무 일수.

[개설]
사일은 해당 관직이 임명되어 실제로 근무한 날짜를 기준으로 산정되었다. 특별한 임무에 종사한 경우에는 별사(別仕)라고 하여 근무 일수를 2배로 쳐 주기도 하였다. 즉, 사일은 특정직의 관원이 해당 직책에서 근무한 날짜의 수이며 승진·전직·체직 등의 기준이 되었다.

[내용]
사일의 계산은 해당 관직 임명 후 실제로 근무한 날짜를 기준으로 산정하였다. 아전의 경우 이조의 고공사(考功司)에서 업무를 담당하였다. 세종대에는 상을 당하여 근무 일수를 채우지 못하였거나 마땅한 보직이 없어서 근무 일수가 부족한 경우 어떤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 근무 일수를 처음부터 다시 계산하지 않고 앞서 일한 기간을 합산해 주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0월 30일]. 세조대에는 군사들이 번을 설 때 시험을 보게 하여 성적에 따라 사일을 더하여 주거나 깎도록 하였다[『세조실록』 4년 2월 22일].


빈전도감(殯殿都監)
이나 실록청도감 등 특별한 임무에 종사한 경우 별사(別仕)라 하여 근무 일수를 2배로 쳐 주는 경우도 있었다. 별사는 근무 일수에는 포함되었으나 품계를 올려 주는 기준 일수에는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6품 이상 관원이 900일, 7품 이하 관원이 450일을 근무할 경우 품계를 올려 주며 의정부나 육조에 속한 당하관은 승진 임명하고, 다른 관리들은 같은 급의 다른 관직에 임명하였다. 의금부 당하관과 제거(提擧)·제검(提檢)·별좌(別坐)·별제(別提)·별검(別檢)무록관(無祿官)은 360일을 채우면 서용하였다. 선전관의 근무 일수는 700일이었다.

지방 관원의 경우 관찰사와 도사는 360일이었고, 절도사(節度使)·우후(虞候)·평사(評事)는 720일, 수령은 1,800일이었다.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지 않은 수령과 훈도·첨절제사(僉節制使)·만호(萬戶)는 900일이었다.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근무하는 토관(土官)은 중앙 관원의 두 배의 기간을 근무해야 했다.


녹사(錄事)
는 514일 근무하면 품계가 올랐으며, 서리(胥吏)는 2,600일을 근무하면 정3품 이상의 관청에서는 종7품, 3품 이하의 관청에서는 종8품까지 승진하였다. 서리는 역승(驛丞)과 도승(渡丞)의 취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승정원의 서리는 2일마다 별사 1일, 홍문관의 책색서리(冊色書吏)는 3일마다 별사 1일을 추가로 인정받았다.

국역으로 수공업을 제작하여 납품하는 장인(匠人)의 경우 900일 동안 근무하면 품계가 올랐다. 상의원(尙衣院)의 비단 장인, 조지서(造紙署)의 종이 장인은 600일을 채우면 승품할 수 있었다. 품계의 승급은 종6품까지였다. 교서관(校書館) 소속 수장(守藏) 업무 담당자와 장책(粧冊) 업무 담당자는 정3품의 품계까지 받을 수 있었다. 형조에 속하는 색장(色掌)은 2,700일을 채워야 품계를 받았고 종8품 이상 승진할 수 없었다. 예조의 악사(樂師)·악생(樂生)·악공(樂工)들은 1,200일을 채워야 했다. 관현악기를 연주하는 맹인[管絃盲]은 복무 일수가 400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 주었다. 장원서(掌苑署)의 별감(別監)의 복무 일수는 1,800일이었고 액정서(掖庭署) 별감을 지낸 경우에는 900일이 기준이었다. 액정서의 사알(司謁)·사약(司鑰)·서방색(書房色)의 근무 일수는 600일이었고 별감은 900일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집필자] 강석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