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에 들어와 처음으로 문무 관제를 정했을 때 서반에는 정·종9품의 관계(官階)를 설치하지 않고 중앙군에 정9품 위(尉)와 종9품 정(正)을 두었다. 1394년(태조 3)에 대장(隊長)과 대부(隊副)로 고쳤으나 정·종9품의 관계는 마련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서반에 제수되는 자들이 곧장 8품에 오르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1436년(세종 18)에 정·종9품의 관계를 새로 마련하고 모두 사용(司勇)으로 호칭했다. 이들이 모두 정9품이 되자 사용 중에 종9품을 별도로 제수했는데, 아마도 이들이 섭사용(攝司勇)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1466년(세조 12)에 부사용(副司勇)으로 고치면서 신설되었다.
[담당 직무]
조선조에 들어와 처음으로 문무 관제를 정했을 때 서반에 대해서는 정·종9품의 관계를 설치하지 않고 다만 중앙군 조직인 10위(衛)와 도부외(都府外)에 정9품 위와 종9품 정을 두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394년에 각각 대장, 대부로 고쳤지만 9품 관계는 마련되지 못했다. 품관이 되지 못해 유품(流品) 외의 서인직(庶人職)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서반에 제수되는 자들이 9품을 거치지 않고 8품으로 뛰는 문제가 발생했다. 1436년에 서반 정·종9품의 관계를 새로이 설치하되 모두 사용으로 호칭하도록 하며 녹과(祿科)는 모두 정품(正品)에 따르게 하였다[『세종실록』 18년 윤6월 19일]. 녹과가 정품이라 실질적으로 정9품만 있었고 종9품은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47년(세종 29)에 300명의 사용 중에서 100명은 정품, 200명은 종품으로 삼았다[『세종실록』 29년 10월 23일]. 그 이후에 섭사용이 기록상에 나타난다. 아마도 이는 고려시대 활발하게 제수되었던 섭직(攝職)의 영향을 받아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무반직을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제수되었다. 이로 보아 종9품에 해당하는 사용을 섭사용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1466년에 대대적으로 관직을 정비하면서 섭사용을 부사용으로 고쳤다. 이로써 부사용이 신설되었다.
[변천]
『경국대전』에서는 종9품, 정원 1,939명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중앙의 5위 조직은 그 기능이 정지되었고, 호군 이하는 관명(官名)만 유지하면서 녹과(祿窠)를 줄여서 승진 또는 강등하여 내부(來付)한 각색(各色) 인원(人員)을 대우하도록 했다. 부사맹의 경우 『속대전』에서는 정원 1,358명을 줄여 581명이 되었다. 원록체아(原祿遞兒) 105명, 공신적장(功臣嫡長) 20명, 선전관(宣傳官) 9명, 무신겸(武臣兼) 27명, 미설가수령(未挈家守令)·변장(邊將) 21명, 사역원(司譯院) 역관(譯官) 17명, 관상감(觀象監) 습독(習讀) 4명, 훈련원(訓鍊院) 습독 22명·권지참군(權知參軍) 4명, 교서관(校書館) 보자관(補字官) 1명·창준(唱凖) 4명, 혜민서(惠民署) 치종(治腫) 1명, 수문장(守門將) 19명, 종친부(宗親府) 의원(醫員) 1명, 궁방(弓房) 사약(司鑰) 2명, 금군(禁軍) 324명 등으로 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