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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중앙군 조직인 오위(五衛)의 용양위(龍驤衛)에 소속되어 숙위(宿衛) 등을 담당하던 병종(兵種).
[개설]
고려 말 국왕의 측근에서 시위 등을 담당했던 성중애마(成衆愛馬)의 한 부류인 사순(司楯)과 사의(司儀)를 조선 태종이 즉위하면서 혁파하고 그 대신 설치했다. 초창기에는 중앙군제의 개편과 관련해서 소수의 정예 부대로 숙위를 주로 담당하였다. 세종 때에 이르러 중앙군에 속했던 주요 병종들과 마찬가지로 국방군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정원이 확장되었다. 세조 때 5위제로 바뀌면서 용양위에 소속되었다. 성종 때 지나치게 늘어난 군액을 조정하는 작업을 거쳐 『경국대전』에 1,500명으로 규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5위제 기능이 마비되면서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후기부터 있었던 사순(司楯)·사의(司衣)를 1400년(태종 즉위) 12월에 혁파하고 그 대신 설치하였다[『정종실록』 2년 12월 19일]. 사순과 사의는 고려 말 국왕 측근에서 시위 등을 담당했던 성중애마(成衆愛馬)의 한 부류였다. 그에 속했던 여러 부류가 각기 다른 연유로 시기를 달리해서 설치되었던 관계로 구성이나 지휘 계통이 다양했다. 이로 인해 업무의 분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국가로부터 받았던 대우도 각기 달라서 운영상의 문제가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일원화된 통솔 체계마저 구축되기 못했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 이전부터 개편 논의가 많았다.
사순과 사의는 고려의 공민왕 이후로 궁중 숙위를 주로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만연하였던 사병제의 운영 원리에 영향을 받아서 국가 기구를 통한 통제보다 국왕 및 몇몇 실력자들과의 사적인 관계에 의거하여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좀처럼 해소되지 못했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1,300명에 달하는 사순과 사의를 혁파하고 비교적 소수의 정액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별시위를 설치하였으며 이어서 삼군부(三軍府)에 소속시켰다. 이는 중앙군은 반드시 국가 기구에 의해 지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집권적 군사 체제의 운영 방식을 확립하고자 했던 방침에서 나왔다.
[조직 및 역할]
설치 당시의 정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 당시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내시위(內侍衛)가 당시 3번(番)에 각 번 40명씩, 총 120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그리고 1419년(세종 1) 12월에 별시위의 수가 4번에 각 50명씩 총 200명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체로 설치 초기에는 200명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발 방식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대개 일반 군역을 부담했던 양인이 아니라 자제(子弟)를 대상으로 시험을 보아서 뽑았을 것이다. 후대의 사료에 의거하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와 도보 중에 활을 쏘는 보사(步射) 시험을 실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 말기에 이르게 되면 지방에서 차출되어 서울 군영으로 보내진 군사인 번상하는 시위군의 액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별시위의 경우에도 비슷한 처지였다. 1432년(세종 14)에 640명, 1441년 1,600명, 1445년 3,000명, 1448년(세종 30)에는 무려 5,000명으로 확장되었으며,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이 수준을 유지하였다.
별시위의 정원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크게 늘어나면서 한꺼번에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우선 갑자기 5,000명으로 증액하여 선발하는 바람에 응시자가 부족해서 충당이 어려웠다. 이에 갑사에 입격했으나 아직 직을 받지 못한 자 및 외방 갑사로 도목장(都目狀)에 오른 자 가운데 자원하는 사람에 대해 가풍(家風)과 족계(族係)를 조사해서 별시위로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자 다시 갑사 취재 때 2재(二才)에 합격한 자 가운데 자원에 따라 가풍과 족계를 살펴서 옮겨가게 했다. 이로 인해 무예 능력이 없는 자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자들이 입속하였다. 그 결과 별시위가 허술해졌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1453년(단종 1) 번상하는 군사의 뒷바라지를 하는 조정(助丁)을 지급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14일]. 번상 근무 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힘없고 경제력이 취약한 사람을 조정으로 만들어 지급함으로써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했다. 결국 충분한 뒷받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제력이 약한 자는 번상을 포기했다. 드디어 세조 사후에 정책이 변경되면서 별시위의 군액이 5,000명에서 2,400명으로, 다시 1,500명으로 축소되었으며, 이것은 『경국대전』으로 이어졌다.
문종 때부터 중앙군의 조직을 일원화했는데 처음에는 5사(五司)에 분속되었다. 세조 때 5위로 개편되면서 그중의 하나인 용양위에 소속되었다. 이는 『경국대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정액 1,500명이었다. 5교대로 하며 6개월씩 근무하였다. 240보, 목전(木箭) 180보, 130보, 기사, 기창(騎槍) 등의 시험을 실시해서 6발 이상을 맞힌 자들을 뽑도록 했다. 240보에서는 반드시 1발 이상을 맞추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궁궐에서의 숙위를 통해 국왕을 호위하는 것과 국가의식 가운데 오례(五禮)에 해당하는 중요한 의식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한편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지방 요충지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취약한 지방군 조직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또 진법과 일반 무예를 교습받았다. 아울러 번상 시 국가가 보유하던 군기를 맡아 의무적으로 수리하기도 했다. 급한 경우에는 도성을 순찰하면서 도적을 잡는 경찰 역할도 가끔씩 수행했다.
[변천]
지방군 조직이 약화되는 가운데 북방에서는 여진족 침입이 계속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별시위를 비롯한 중앙의 숙위군들이 자주 출동하거나 번상 대신 부방하는 일이 잦았다[『성종실록』 21년 윤9월 1일]. 부방은 타 지방의 병사가 서북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했다. 한편 번상하는 군사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고 경제적 사정도 나빠서 포기하는 자가 늘면서 중앙으로 올라와 근무하는 인원이 매우 적었다. 한때 비슷한 위치에 있던 갑사와 더불어 서울에 머물렀던 자가 125명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성종실록』 22년 2월 14일].
숙위군의 병력이 부족해지자 궁궐 호위를 담당하는 내금위(內禁衛)의 확대, 서북 변방의 방위와 궁중 숙위를 위해 정로위(定虜衛)·우림위(羽林衛) 등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폐정으로 혼란이 심해지면서 상당한 부침을 겪어야 했다. 중종대 들어서 고형산(高荊山)의 주도로 병력 증강 작업이 추진되었다. 그로 인해 법적 정원인 1,500명을 훌쩍 뛰어넘는 2,100여 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번상 인원은 전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중종실록』 11년 8월 4일]. 이에 더욱 분발해서 보충하고자 했으나 실효는 거의 없었다.
마침내 경연 석상에서 국왕도 별시위가 원액보다 많아 허장성세일 뿐 실지가 없다면서 정선하여 감액하는 방안을 논의하도록 했으나, 군적을 조사하면 사망했거나 상례(喪禮)·질병 등으로 번을 들 수 없는 자가 많아서 곤란하다는 답을 들었다. 더구나 국방의 주요 요지인 평안도와 함경도 등 양계(兩界)의 군사마저 정원에 차지 못한 실정이라 군액의 감축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액수만 채우려고 노력하다 보니 서인(庶人)들로 편성되어 재주가 없는 자가 다수 입속하게 되었다. 원래 사족(士族) 가운데 무예 능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고자 했는데 상황이 이에 이르자 기피하면서 더욱 허술해졌다[『중종실록』 36년 11월 23일]. 이런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5위 소속의 숙위군은 그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별시위도 예외가 아니었다. 드디어 『속대전』에서 5위 병제를 모두 혁파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에 별시위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