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시대에 각 도에 설치한 도회잠실(都會蠶室)이나 궁궐에 둔 잠실에서 누에 치는 일을 맡아보던 여성.
[개설]
잠모는 단순히 누에를 치는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각 지역에 설치한 도회잠실이나 궁궐에 설치한 잠실에서 일하며, 누에를 먹이고 키우는 전 과정을 책임진 여성을 말한다. 도회잠실의 경우 관아나 혁파된 절의 노비 중에서, 궐내 잠실의 경우 장흥고(長興庫)나 예빈시(禮賓寺), 병조(兵曹) 등 여러 관청의 관비 중에서 누에를 잘 치는 자를 선발하였다. 궐내 잠실의 잠모는, 왕비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거느리고 궁궐 후원에서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할 때 의례의 보조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 ‘잠모’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1416년(태종 16)의 일이다.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朝宗)과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에 새로 잠실을 설치하고, 각각 잠모 10명과 종비(從婢) 10명, 노자(奴子) 20명씩을 소속시켰다고 한다[『태종실록』 16년 2월 24일].
조선시대에 잠모가 수행한 임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양잠을 하여 명주실을 생산하고, 둘째, 왕비가 친잠례를 거행할 때 의례를 보조하며[『성종실록』 8년 윤2월 25일], 셋째, 일반 농가에 양잠 기술을 전수하는 일을 하였다. 누에는 추위나 더위에 민감하기 때문에, 잠모는 홑옷을 입고 일하며 누에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살폈다. 누에를 쳐서 뽑은 명주실이 많은 경우에는 호조(戶曹)에서 쌀과 옷감 등을 상으로 받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처벌을 받았다[『세조실록』 5년 6월 28일]. 남편이 있는 경우에도 잠모가 될 수 있었으나,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이 안 된 여성이나 너무 어려서 경험이 없는 노비는 될 수 없었다.
한편 친잠례를 거행할 경우, 별잠실(別蠶室)에서 일하는 잠모 가운데 8명을 선발하여 의례를 돕도록 하였다. 선발된 잠모는 의례 당일에 상복(常服)을 입고, 왕비와 내외명부가 뽕잎을 따기 위해 설치한 채상단(採桑壇)에서 채취한 뽕잎을 받아 실처럼 가늘게 썬 뒤 누에에게 먹이는 역할을 하였다. 의례에 참석한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잔치를 베풀 때, 잠모는 친잠단 아래쪽에 마련된 자리에서 음식을 제공 받았다. 친잠례에 참석한 잠모는 의례가 끝난 뒤 옷은 반납하고 면포(綿布) 1필을 상으로 받았다[『성종실록』 24년 3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