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천첩(賤妾)은 양인 남성이 천인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둘 경우 그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양첩(良妾)과 달리 호적에 등재되는 경우도 드물고 가계 기록에서는 그 존재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 소생인 얼자녀(孼子女) 역시 가계와 사회 구조 내에서 의례·상속 등 모든 면에서 차별 받고 소외 받는 존재로서 양반 사회의 모순을 보여 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첩의 종류는 먼저 첩의 신분을 중심으로 양첩과 천첩으로 나뉜다. 즉 양인 여성이 양인 남성의 첩이 된 경우와, 천인 여성이 양인 남성의 첩이 된 경우를 말하며, 이때 양인 남성이란 천인을 제외한 전 신분 계층을 의미한다. 천첩은 다시 비자(婢子)를 첩으로 삼은 비첩(婢妾)과 기생을 첩으로 한 기첩(妓妾)으로 나눌 수 있다. 관기(官妓)의 경우 그들도 관비(官婢) 신분이므로 비첩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일반 노비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기첩이라 칭한다. 천첩 중 가장 비중이 큰 부류가 비첩인데, 비첩은 다시 자기비첩(自己婢妾)과 타인비첩(他人婢妾)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자기 소유의 계집종을 첩으로 삼으면 자기비첩이라 하고, 타인 혹은 관서(官署)에 소속된 계집종을 첩으로 삼는 경우 이를 타인비첩이라 한다. 천첩의 상당수가 비첩이고 그 중에서도 자기비첩이 많았다. 즉 정식 혼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첩을 취하므로 양반들은 자신들이 접촉하기 쉬운 환경에서 이들을 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첩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였으므로 첩을 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첩을 통해 태어난 소생의 신분이나 사회 진출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 경우 역시 양첩 소생인 서자(庶子)보다는 천첩 소생인 얼자(孽子)가 더욱 문제시되었다. 고려시대 이래 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어도 그 자녀가 천인이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리를 통해 천인 소생이 천인 신분을 이어받는 분위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양인 남성과 천인 여성이 결합하여 소생을 낳으면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종모법(從母法)과 종부법(從父法)을 번복하면서 노비 소유자 층인 양반과, 양인을 확보해야 하는 조정 간의 이익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종모법은 그 소생을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종천(從賤)하는 것이고, 종부법은 양인인 아버지를 따라 종량(從良)하는 것이었다. 조선초기에 종부 종량 원칙에 따라 천첩 소생도 양인이 될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 그 후 양인 인구가 어느 정도 확보되자 종부법을 종모법으로 바꾸어 천첩 소생은 다시 환천(還賤)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만 『경국대전』에 품관·문무과 출신 등 특수 신분층의 천첩 소생에 대한 속신(贖身) 규정이 생겨 일부는 천인 신분 또는 천역(賤役)에서 구제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천첩 소생이더라도 아버지의 신분이 양반인 경우 천역을 물려받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천첩은 친족 조직 속에서도 항렬에 따른 지위를 부여 받지 못하고, 적처(嫡妻) 소생에게 부모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양반이 자기비첩을 취하여 소생을 낳은 경우, 그 소생은 적처 소생 남매에게 부림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16세기 고문서 중에는 아버지의 자기비첩 소생인 얼남매(孼男妹)를 부리기가 편치 않다는 이유로 다른 집 노비와 교환하거나, 매매하는 사례가 발견된다. 또 양반가의 호적에 등장하는 노비 중 아버지를 ‘부부지(父不知)’로 기록한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비첩 소생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현상들은 천첩 뿐 아니라 얼자녀도 양반의 친족 조직 속에 융합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복상제(服喪制)에서도 첩에 대해 남편이나 아들이 복을 입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남편이 대부(大夫)이면 양첩(良妾)을 위하여, 사(士)이면 아들 있는 첩을 위하여 시마(緦麻) 3월을 복상(服喪)하도록 하였다. 첩이 남편의 자식에 대해서도 서모(庶母)·자모(慈母)·유모(乳母)의 지위에 있는 경우에 한하여 정해진 복상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는 양첩에 대한 규정일 뿐 천첩에 대해서는 복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렇듯 천첩은 조선시대에 그 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양첩과는 달리 양반 사회의 친족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변천]
한국 사회는 고대부터 일부일처제였기 때문에 다처(多妻)의 풍습이 없는 대신 관습적으로 첩을 용인했다. 고려후기에는 원나라의 영향으로 일시적이지만 다처의 관습이 있기도 했다. 그런 관습이 조선초기까지 이어졌으나 태종대에 대대적으로 처첩분변(妻妾分辨)이 이루어지면서 첩의 신분,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지위와 처우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후 재산 상속과 복상(服喪) 규정 등 가족 및 사회 내에서의 지위가 『경국대전』을 통해 확립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용만,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 집문당, 1997.
■ 한국사회사연구회, 『한국의 전통사회와 신분 구조』, 문학과지성사, 1991.
■ 배재홍, 「조선시대 천첩 자녀의 종량(從良)과 서얼 신분 귀속」, 『조선사연구』3, 1994.
■ 배재홍, 「조선 후기의 서얼 허통과 신분 지위의 변동」,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이상백, 「‘천자수모(賤者隨母)’ 고(考): 양천교혼(良賤交婚) 출생자의 신분 귀속 문제」, 『진단학보』25·26·27, 1964.
■ 이태진, 「서얼차대고(庶孼差待考): 선초 첩자(妾子) ‘한품서용(限品敍用)’제의 성립 과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27,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