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학록(學錄)은 성균관에 소속된 정9품 관직으로, 1392년(태조 1)에 처음 설치된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될 때까지 인원과 품계 등의 조정이 있었다. 학록은 성균관 유생의 고강(考講) 때 실무를 담당하거나 양현고(養賢庫)의 녹사(錄事) 등을 겸하였다. 1895년(고종 32)경 성균관 제도가 변화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학록은 학정(學正)과 성균관의 실무를 주관하였는데 주로 성균관의 정록소(正錄所)에서 근무하였다. 학록은 성균관 유생들을 고강할 때 실무를 담당하였다[『태종실록』 9년 12월 7일]. 또한 성균관 유생의 공궤(供饋)를 위한 미곡과 어물이나 채소 등을 출납하던 양현고의 녹사나 직장(直長)·봉사(奉事) 등을 겸하였다. 다만, 본직이 갈리면 겸직 역시 그만두었다[『세종실록』 8년 11월 12일]. 이 밖에 학록은 도감(都監)이 설치되면 차출되거나 능의 제관(祭官) 등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변천]
1392년 7월 28일 문무백관의 관제를 반포할 때 성균관이 설치되었으며, 이때 학록은 정원 2명의 정9품 관직으로 설치되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66년(세조 12) 1월 정원 중 1명을 줄였으나, 이후 간행된 『경국대전』에서는 정원 3명의 정9품 관직으로 규정되었다. 아울러 『경국대전』에서는 학록을 포함, 성균관 소속의 정7품 박사(博士) 이하 관직은 의정부 소속의 사록(司祿) 1명과 봉상시의 직장 2명이 겸임하도록 규정하였다.
학록을 비롯한 성균관의 참하관으로서 늙은 어버이가 있어 정사(呈辭)하는 자는 기한이 지나면 파직되었다. 그러나 성균관의 관행에 학록으로 파직당하면 학정으로 천거하고, 학정으로 파직당하면 박사로 높여서 다시 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비록 기한이 지났다 하더라도 즉시 와서 근무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에 1491년(성종 22)부터는 이극증(李克增)의 건의로, 기한이 지나 파직된 자는 승진시켜 천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겸학록(兼學錄) 3명이 증설되기도 하였다.
학록은 이후 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과정에서 성균관의 성격이 변화되고 이어 1895년에 종전의 관직이 폐지되면서 새롭게 성균관 직제가 마련되었는데, 학록 역시 이 시기를 전후해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