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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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강(直講)

서지사항
항목명직강(直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성균관(成均館)
관련어사학(四學), 종학(宗學)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성균관에 소속된 정5품의 관직.

[개설]
직강(直講)은 성균관에 소속된 정5품 관직으로, 1392년(태조 1)에 처음 설치된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될 때까지 인원의 조정이 있었다. 직강은 성균관 유생의 교육을 전담하였을 뿐 아니라 종학(宗學)과 사학(四學)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경 성균관 제도가 변화되면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1430년(세종 12)부터 종학의 관원을 겸직하며, 대군(大君)을 비롯한 종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세종실록』 12년 3월 6일]. 전적(典籍)과 함께 종학의 전훈(典訓)과 사회(司誨)를 겸하였다[『예종실록』 1년 6월 18일]. 또한 사학의 교관으로 차출되어 교육을 전담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8년 윤2월 25일].

직강은 본 업무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였다. 성균관의 겸춘추를 담당하며[『중종실록』 34년 6월 6일], 성균관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였다. 아울러 왕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1422년(세종 4)에 직강 권극화(權克和)는 나주(羅州)의 팔흠도(八歆島)에 파견되어 침향(沈香)을 캐기도 하였다[『세종실록』 4년 2월 29일]. 또한 일본국 사자(使者)를 접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세조실록』 5년 4월 16일], 생원시에 시관으로 차출되기도 하였고[『세종실록』 20년 2월 20일], 윤대(輪對)에도 참석하였다[『세조실록』 4년 4월 18일]. 이 밖에도 간혹 특정 사안이 있을 때에 임시로 가직장(假直講)에 차출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년 4월 11일].

직강은 성균관 유생의 사표(師表)라는 인식이 있어, 간혹 문제가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대간이 탄핵을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511년(중종 6)에는 박곤(朴鯤)이 전처를 버리고 다시 장가를 들었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은 바 있고[『중종실록』 6년 9월 19일], 김형(金泂)은 이전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있을 때에 녹비(鹿皮)를 구득하여 그 도의 수령(守令)들에게 팔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중종실록』 7년 12월 17일].

[변천]
1392년 7월 28일 문무백관의 관제를 반포할 때 성균관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직강은 정원 1명의 정5품 관직으로 설치되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문신이 아니면 임용될 수 없는 관직이었다[『세조실록』 7년 11월 20일]. 1466년(세조 12) 관제 개혁 과정에서 정원이 4명으로 증액되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그대로 규정되었다. 같은 성균관 소속의 사예(司藝)와 함께 구임관(久任官)이다. 1506년(연산군 12) 1명을 감원하였다[『연산군일기』 12년 1월 6일]. 1629년(인조 7)에는 궐원이 된 직강의 자리를 시종신(侍從臣)으로 임명하였다가 곧 다른 관직으로 옮기는 방식이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이유로, 시종신보다는 다른 관서의 관원이 겸직하는 자리로 하자는 이조(吏曹)의 제안이 있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인조실록』 7년 7월 24일]. 시종신이란 왕의 측근에서 비서 역할이나 간쟁, 자문 등의 역할을 담당하는 관원을 말한다.

직강은 이후 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과정에서 성균관의 성격이 변화되고, 1895년 종전의 관직이 폐지되면서 새롭게 성균관 직제가 마련될 때, 직강 역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석호, 「이조초기의 성균관의 정비와 그 실태」, 『대동문화연구』 6·7, 1970.
■ 이성무, 「선초의 성균관 연구」, 『역사학보』 35·36, 1967.

■ [집필자] 조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