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국가의 경영에는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일정한 혈통, 명분상의 문제가 있는 경우도 관료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경우에는 관료가 받을 수 있는 품계의 상한선을 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한품서용의 대상은 우선 천인이거나 천인의 피가 섞인 경우였다.
한품서용의 주 대상은 사족이 첩을 얻어 낳은 서얼이었다. 양첩(良妾)에게서 낳은 아들의 경우 첩의 자식이라는 명분상 문제가 있었고, 천첩(賤妾)에게서 낳은 아들의 경우는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혈통상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서얼은 한품의 제한을 받아 정3품 당하관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한품의 적용을 받는 경우 받을 수 있는 관직도 제한되어 있었다. 즉, 한품을 받는 자는 특정한 관직에만 임명되는 한직제의 제한을 받았다. 서얼은 잡직으로 규정되는 기술직인 전의감·사역원·관상감 등에만 임용될 수 있었고, 다른 사족직에는 진출할 수 없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실록』에 한품의 용례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태종대였다. 1408년(태종 8) 태종은 중국 무역에 기여한 이들에게 그 공을 참작하여 관직을 내렸다. 그중 천인에게는 한품을 부여하여 5품에서 7품까지의 관직을 내렸다[『태종실록』 8년 4월 7일]. 이후 1413년에 사간원에서는 장주(張住)의 서경(署經)을 내면서 장주(張住)가 기생첩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고신의 말미에 ‘4품에 한함’이라고 품계를 제한하였다[『태종실록』 13년 6월 16일].
이와 같이 한품을 부여한 사례가 있었으나, 제도로서 정착된 것은 1414년 비첩 소생들에 대한 한품제가 만들어지면서부터였다. 의정부에서는 천인들이 한품의 관직을 받는 것을 지적하면서 비첩 소생에게도 관직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태종은 2품 이상의 자기 비첩(婢妾)의 아들은 영구히 양인으로 삼고, 관직은 5품에 한하라고 명하였다[『태종실록』 14년 1월 4일]. 대신들에게 부여한 문음제를 서얼에게도 부여하기 위해서 2품 이상의 서얼을 대상으로 하는 한품제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후 한품제의 규정은 더욱 상세하게 정비되었다. 1415년 2품 이상은 5품에 한하고, 3품 소생은 6품에 한하며, 4품 소생은 7품에 한하고, 5·6품 소생은 8품에 한하며, 7·8품 소생은 9품에 한하고, 9품 권무(權務)의 소생은 학생에 한하며, 서인의 소생은 백정(白丁)에 한하는 한품제 규정이 정비되었다[『태종실록』 15년 3월 8일].
국가에서는 불가피하게 혈통과 명분상 문제가 있는 이들에게도 관직을 부여해야 했지만, 한품을 부여하여 이들이 사족과 섞이는 것은 막고자 하였다.
[내용]
서얼을 중심으로 하는 한품제가 시행되었지만, 한품제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한품제 시행에 따른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한직제의 시행이 그것이었다. 즉, 품계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임용될 수 있는 관직도 제한하였다.
한품의 제한을 받는 경우 국가의 경사로 모든 관원들이 가자(加資)될 때에도 한품의 범위 내에서만 가자되었다. 또한 국가에 공을 세워서 가자되는 경우에도 한품 내에서만 가자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한품의 제한은 국가에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경우 극복될 수 있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을 녹훈하면서 세조는 첩의 아들이라도 한품을 적용하지 말고, 공·사 천인은 모두 천인의 신분을 면하게 하라고 명하였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이와는 별도로 왕이 관료의 능력이나 공로를 치하하여 한품의 제한을 넘어서 품계를 올려 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대간들은 부당함을 문제 삼기도 하였다. 1488년(성종 19) 천첩 소생인 박곤이 음률을 잘 관장하였다는 이유로 성종이 한품 이상으로 품계를 올려 주자, 사간원에서는 박곤은 천첩 소생이고 그 공(功)도 크지 않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이는 특지(特旨)이므로 한직에 구애될 수 없다고 대응하였다[『성종실록』 19년 윤1월 29일].
[변천]
명종대에 이르러 한품제의 폐지가 서얼 허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었다. 1553년(명종 8)부터 서얼 허통의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이에 대한 관원들의 의견은 분분하였으나 심연 등 삼정승은 허통에 찬성하였다. 이에 명종은 서얼을 허통할 수 없다는 것이 비록 조종조의 성법이라고는 하지만 국가가 인재를 아끼는 뜻에서 볼 때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삼공의 의득(議得)에 의하여 양첩의 아들이 양처(良妻)를 취하였을 경우에는 손자에 이르러서 허통하고, 천첩의 아들이 양처를 취하였을 경우에는 증손에 이르러 허통하되, 현직(顯職)에는 서용하지 않는 절목(節目)을 만들라고 예조(禮曹)에 명하였다. 즉, 서얼의 경우에도 일정 대수가 지나면 제한을 풀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다만 현직, 즉 청요직의 서용은 제한을 받았다[『명종실록』 8년 10월 7일].
그러나 바로 뒤인 같은 해 11월에 승정원에서는 현직(顯職)에 대하여 재해석하면서 그간 서얼이 받은 직은 동서반의 정직(正職)이 아니라 삼의사(三醫司)의 직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현직이라는 것은 대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서반의 정직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하여 현직을 청요직이 아닌 동서반 정직으로 확대하여 해석하였다[『명종실록』 8년 11월 2일]. 이는 서얼이 일정 대수가 지나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동서반 정직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여전히 기술직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1625년(인조 3)에도 서얼의 허통 문제가 논의되었다. 인조는 서얼의 제한이 심하다고 지적하면서 자자손손이라고 한 말은 반드시 법률을 만든 본뜻이 있을 것이나 지금은 우선 그 대수를 한정 지어 변통하자고 서얼 허통의 문제를 다시 논의하였다. 이에 비변사에서는 “성종대에 『경국대전』을 반포하면서 서얼의 자손에게 문무과·생원과(生員科)·진사과(進士科) 등의 과거를 허락하지 않는 법을 두었는데, 증손(曾孫)은 금령이 없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그 뒤 『경국대전』을 주해할 적에 자자손손이란 말이 첨가되어 이로부터 영원히 금지 당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하여 서얼의 금고(禁錮) 연원을 밝혔다. 또한 비변사에서는 서얼 중에서 “양출은 손자에 이르러 허락하고 천출은 증손에 이르러 허락하면 알맞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미 과거를 허락하고 나서 버려두고 쓰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과거를 허락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앞으로 재주에 따라 직책을 주어 헛되이 늙는다는 탄식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이러한 비변사의 뜻을 받아들였다[『인조실록』 3년 11월 13일]. 즉, 서얼의 금고 대수를 제한하여 과거 응시를 허용하고, 과거에 합격하면 서용하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조선후기에는 서얼 통청 운동으로 이 문제가 더욱 확대되어서 논의되나, 청요직의 서용에 대한 문제로 한품을 제한하는 문제에서는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