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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종친 및 문무관 실직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친공신·유현·공훈자 등에게 사후 시호를 내려 주던 제도.
[개설]
봉상시(奉常寺) 에서 담당한 증시 행정은 종친과 문무관 실직(實職) 정2품 이상이 그 대상자였다. 시장(諡狀)을 접수하는 관서는 예조(禮曹)였다. 이 시장은 봉상시를 거쳐 홍문관으로 이송되었으며, 최종 삼망단자(三望單子)를 홍문관과 봉상시의 삼망과 합친 다음 의논하여 시호를 확정하였다. 이를 왕에게 입계하면 그중 하나를 낙점하였으며, 이 시호 교지는 제문과 함께 내려졌다. 증시 대상은 조선후기에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유현(儒賢)·절의(節義)로까지 확대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시호에서 시(諡)는 행위의 자취요, 호(號)는 공(功)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시는 죽은 이의 생전 행적의 선악을 살아 있는 이들이 평가하여 후손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포폄(褒貶)의 의미가 있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시호는 큰 절문으로 선행(善行)을 높이고 평생의 선악을 드러내어서 후세에 권장과 징계를 보이니, 명교(名敎)에 보탬이 되는 것이 많다.” 하였다. 따라서 1438년(세종 20)에 시법서를 편찬하고 증시를 법규로 제정한 것은 실덕(實德)을 밝혀 권계(勸戒)하고 명분과 교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한 것이었다.
[내용]
『경국대전』에는 종친과 문무관 실직 정2품 이상에게 시호를 준다고 규정되었다. 친공신(親功臣)은 비록 직위가 낮더라도 역시 시호를 주는 특전이 있었다. 이 증시 업무는 봉상시정(奉常寺正) 이하가 의논하여 정하였으며, 행장(行狀)과 함께 이조(吏曹)에 보고하였다.
증시 업무는 봉상시에서 관장하였다. 시호를 받을 사람의 자손은 예조(禮曹)에 증시를 청하기 위하여 시장(諡狀)을 제출하였다. 시장은 시호 논의에 필수적인 증시 받을 사람의 행장(行狀)이었다. 시장은 대제학이나 관각(館閣)의 당상, 곧 홍문관·예문관·규장각 등의 당상관이 찬술할 자격이 있었다. 이외에 현임이 아니더라도 일찍이 대제학 혹은 관각의 당상을 거친 자, 당시에 문명(文名)이 있는 자도 모두 시장을 찬할 수 있었다. 시장의 말미에는 찬자를 명기하고 수결(手決)하였다. 유현이나 행적이 탁이(卓異)한 자는 부대장시의(不待狀諡議)를 거쳐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부대장시의는 시장을 토대로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시호를 내리는 특전을 말하였다. 이는 왕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시장을 접수한 예조에서는 그 내용을 검토한 뒤에 이상이 없으면 봉상시에 이관하였다. 봉상시에서는 이를 다시 홍문관으로 이송하여 의시(議諡)를 통보하였다. 의시에는 홍문관의 동벽(東壁) 이하 3명이 참석하여 논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홍문관의 관원 5~7명이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동벽에게 주어진 지위와 권한은 절대적이어서 홍문관의 장관인 대제학이 결석하더라도 응교 등 동벽이 출석하면 의시할 수 있지만, 동벽이 결석이면 어떤 상황에서도 의시가 진행될 수 없었다.
동벽의 지휘 하에 의시가 시작되면, 하위 관원 한 사람이 시장을 낭독하였다. 그러고 나면 참석자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 시호 삼망(三望)을 확정하였다. 이것을 서사관(書寫官)을 시켜 정서(正書)하여 봉하고 동벽이 이름을 적고 서압(署押)한 즉시, 봉상시의 색리(色吏)를 불러 망단자와 시장을 주어 보냈다. 이때 동벽은 봉상시와 시호를 합의할 일자를 통보하였다.
이렇게 정해지는 시호는 시법에 따라 결정되었다. 세종은 1438년(세종 20)에 시법의 찬집을 명하였다. 그 명에 따라 『사기』·『의례경전통해속』·『문헌통고』에 실려 있는 기록들을 합하여 301자의 시자(諡字)를 주조하여 인쇄하였다[『세종실록』 20년 6월 17일]. 이러한 시법의 찬집은 이전부터 수행해 온 연구가 바탕이 되었다. 세종은 이미 1431년에 집현전에 명하여 널리 옛글을 상고하여 묘호를 봉하여 높이는 사례를 아뢰라는 명을 내린 바 있었던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수년 동안 시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441년(세종 23)에 의정부에서 시법을 논하면서 중국 고전과 역사상의 다양한 사례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연구와 시법서의 편찬을 배경으로 하였다. 따라서 시호는 이 시법서에 수록된 시자 중에서 시장을 근거로 증시받을 사람의 생전 행적에 가장 부합하는 글자를 선정하였다.
시호를 합의하는 합시일(合諡日)이 되면, 봉상시에서는 동벽 중 1명을 불러 합시를 진행하였다. 색리 1명이 시호망이 기록된 봉서를 가지고 대기해 있다가 동벽이 말에서 내리면 이를 진헌하였다. 봉서를 전달받은 동벽은 봉상시로 들어가 여러 관원들과 서로 읍하고 동서로 나뉘어 좌정하면 합시가 시작되었다. 합시는 봉상시에서 정한 시호망을 통합하여 심의하고 삼망을 확정하는 자리였다. 그렇더라도 최종 결정권은 사실상 동벽에게 있었다. 봉상시에서 의정한 수망(首望)은 최종 단계에서는 말망(末望)에 의망(擬望)하는 것이 관례였다.
삼망이 확정되면, 이조에서 시호망단자를 왕에게 아뢰었다. 그 절차는, 봉상시에서 예조에 첩정을 보내면 예조에서 이조에 관문을 발송하였다. 법전에는 봉상시와 홍문관에서 시호를 의정하면 의정부의 검상 또는 사인 중 1명이 서경(署經)한 뒤 행장을 아울러 이조에 보고하면, 이조에서 입계하여 낙점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에 따라 이조에서는 의정부에 첩정을 보내어 서경을 받고서 계목(啓目)으로 왕에게 입계하였다. 입계는 승정원을 거치는데, 이조의 업무를 주관하는 도승지가 담당하였다.
왕은 삼망 중 어떤 것을 낙점해도 무방하였지만, 수망에 낙점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부망(副望)이나 말망에 낙점하기도 하고,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왕이 시호망을 고쳐 낙점하기도 하였다. 낙점된 시호는 양사의 서경을 거쳐 교지가 발급되었다. 서경은 사헌부와 사간원 각 3명씩 합좌하여 의결하였는데, 3심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의망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16세기까지만 해도 매우 엄격하게 지켜지다가, 17세기 이후로는 약화되어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선시(宣諡) 혹은 사시(賜諡)에는 왕의 교서와 제문(祭文)이 함께 내려졌다. 따라서 후손이 벼슬이 없을 경우에는 연시(延諡)할 수 없었다. 연시는 영시(迎諡)라고도 하는데, 시호 교지를 맞이하는 일정한 의례 절차였다. 선시는 증시를 받는 자의 후손가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주무 부서인 이조에서는 낭관을 사시관으로 파견하여 선시 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시호 교지를 받든 후에는 사당에 전을 드리고 고유(告由)하면 되었다. 그리고 연시연(延諡宴)이 베풀어졌다.
[변천]
증시는 중국 주 나라에서 기원되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로 계승되었다. 고려에서는 개국초 이래로 많은 사람의 시호가 확인되나,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개국과 함께 시호 수여 대상과 시행 절차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실시하였다. 증시의 주된 요건은 사환(仕宦)·학행(學行)·공훈·충절 등이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바와 같이, 사환과 공훈을 중심으로 하던 것이 후기로 갈수록 증시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영조 연간의 『속대전』에는 ‘정3품 통정대부 이상으로 문망이 있고, 현직이나 관각(館閣) 및 구경(九卿)을 거친 자’로 규정하였다. 정조 연간의 『대전통편』에는 ‘가선대부(종2품) 이상의 대제학을 역임한 자 및 유학으로 현명이 있는 자, 절의로 죽은 사람으로서 특히 드러난 자’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좋은 의미의 시호인 미시(美諡)와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진 시호인 악시(惡諡)는 한 번 정해지기만 하면 그에 따른 영욕(榮辱)의 이름이 영구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증시를 받는 입장에서는 미시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문(文)’ 자와 ‘충(忠)’ 자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았다. 같은 ‘문’ 자라도 원하는 해의(解義)가 따로 있어 이를 받고자 하는 욕구가 대단하였다. 「시법해」를 보면, 신(神)·황(皇)·제(帝)·왕(王)·문·덕(德)·무(武) 등 각 시자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그 뜻을 풀어놓은 해의(解義)를 부여하고 있었다. 공(恭) 자는 9가지의 해의를 지녀 가장 많고, 문·영(靈)·장(莊)이 6가지로 그다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증시를 받는 자는 좋고 아름다운 시호를 받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도 악시에 대한 불만으로 담당자를 처벌하기도 하였다. 태종 연간에 완평군(完平君) 이조(李朝)에게 시호를 올린 적이 있었다. 이때 이조 정랑 박관(朴冠)과 좌랑 유미(柳渼)를 파직하였다. 그 이유는 이조에서 의논하여 올린 삼망이 모두 악명(惡名)이었기 때문이다[『태종실록』8년 4월 29일]. 민간에서도 결정된 시호에 불만이 있을 경우에 정파·학파의 차원에서 시호나 시주(諡註)를 고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성종 연간에 김극유가 ‘정(丁)’ 자가 아비의 품행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고쳐 줄 것을 상소한 바 있다[『성종실록』 13년 1월 25일]. 여기에 시호 관련 시비도 속출하였는데, 19세기 중반 이황과 그의 문인 김부필의 후손 간에 야기된 이른바 문순시비(文純是非)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삼봉집(三峰集)』
■ 임민혁, 『왕의 이름, 묘호』, 문학동네, 2010.
■ 김학수, 「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증시(贈諡) 행정」, 『고문서연구』 23, 2003.
■ 박홍갑, 「조선시대의 시호제도(諡號制度)」, 『한국 중세 사회의 제문제: 김윤곤교수정년기념논총』, 한국중세사학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