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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포폄은 매년 6월과 12월 경·외관의 근무 실적을 평가하여 왕에게 보고하던 조선시대 제도였다. 이 평가 성적을 기준으로 승진과 파직 등의 인사가 이루어졌다. 수령은 군정(軍政)도 평가 항목이므로 관찰사(觀察使)가 절도사와 상의하였으며, 경관(京官)은 각사의 제조나 당상관(堂上官)이 소속 조(曹)의 당상관과 상의하여 등급을 매겼다. 무관은 절도사가 평가 책임자였다. 사헌부와 사간원 및 세자시강원 관원은 포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포는 공덕을 기려 포상한다는 뜻이며, 폄은 그 반대로 내치거나 벌한다는 뜻이었다. 유교의 오랜 역사 정신인 포폄이 현실의 관료 인사 행정에 도입된 것이었다. 수령의 칠사(七事)와 경관의 행정 업무는 치민(治民)의 하나로서, 그 실적에 대한 엄정한 평가는 국가와 사회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유교 사회의 이념과 상통하였다. 여기서 수령의 칠사란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을 통치할 때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사항으로서, 농상(農桑)을 성하게 하고, 호구(戶口)를 늘리며, 학교를 진흥시키고, 군정(軍政)을 닦으며, 역(役)의 부과를 균등하게 하고, 소송을 간명(簡明)하게 하며, 아전들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하는 것을 말하였다. 수령의 포폄이 강조된 것은 위민(爲民) 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며, 이 제도는 모든 관원에게 확대 적용되었다.
[내용]
포폄은 관리의 근무를 평가하는 제도였다. 『경국대전』에는 “경관은 그 관사(官司)의 당상관·제조(提調) 및 소속 조(曹)의 당상관이, 외관(外官)은 그 도(道)의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등급을 매겨 왕에게 보고한다.” 하고 규정하였다. 1년에 2차례에 걸쳐 경외의 모든 관원에 대하여 근무 평가를 시행하도록 한 것이었다. 사헌부·사간원·세자시강원 관원은 예외로 하였다.
수령은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와 같이 상의하여 평가하고, 제주 삼읍(三邑)은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등급을 매겨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경·외관은 부임한 지 각각 만 30일, 만 50일이 되어야 등급을 매길 수 있었다. 범죄의 혐의로 추문(推問)을 받아 기한 내에 등급을 매기지 못한 자는 그 추문이 끝난 뒤에 등급을 매겨서 왕에게 아뢰었다.
평가 결과는 등급에 따라 출척(黜陟)이 매우 엄정하였다. 열 번 고과(考課)에 열 번 다 상(上)을 받은[十考十上] 자는 상(賞)으로 1계(階)를 올려 주고, 당하(堂下) 정3품인 계궁자(階窮者)는 관직을 올려 주었다. 목(牧) 이상의 경우에는 예외로 하였다. 두 번 중(中)을 받은 자는 무록관(無祿官)에 서용하고, 세 번 중을 받은 자는 파직되었다. 오고(五考)와 삼고, 이고에 한번이라도 중을 받은 자는 현직보다 높은 직을 줄 수 없으며, 두 번 중을 받은 자는 파직되었다. 예문관·성균관·승문원·교서관의 7품 이하 관원으로서 중을 받은 자는 그 도목(都目)에서는 전임시키지 않으며, 체아(遞兒)가 있는 관아(官衙)의 전직 관원으로서 중을 받은 자는 다음 차례의 포폄이 있기 전에는 서용할 수 없었다. 1년에 사도목(四都目)을 치르게 되어 있는 자가 중을 받으면 한 도목을 건너서, 하(下)를 받으면 두 도목을 건너서 취재(取才)를 보게 하였다. 당상관인 수령은 한 번 중을 받으면 파직시켰다.
하(下)를 받았거나 사죄(私罪)를 범하여 파직된 자는 2년이 지나야 서용되었다. 의친(議親)이나 공신으로서 하를 받은 자는 1년이 경과되어야 서용하였으며, 당상관은 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하등(下等)인 자는 모두 직후의 취재에 응시할 자격이 박탈되었으며, 다음번 시험에 취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변천]
수령 포폄법은 1406년(태종 6) 12월에 제정되었다. 이 법은 포폄에서 상등(上等)이 되면 고만(考滿)으로 서용하고, 연달아 중을 받은 자는 모두 파직시켰다. 그동안 수령 포폄은 덕행(德行)과 등제(等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행정의 실제 효과 정도를 논하지 않는 모순이 있었다. 이를 바로잡고자 장(狀)의 뒤에 적은 칠사(七事)를 고찰하고, 등제와 실효의 사목(事目)을 나누어 만든 항목 아래에다 그 평가를 기록하여 보고함으로써 출척(黜陟)의 근거로 삼도록 하였다.
평가 항목으로는 첫째, 마음을 인(仁)과 서(恕)에 두어 궁핍한 사람을 진휼한 것이 몇 사람이며, 늙고 병든 사람을 혜양(惠養)한 것이 몇 사람인가. 둘째, 몸소 행함에 청렴근신(淸廉謹愼)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어떤 일에서 절감하였는가. 수렴(收斂)을 감손(減損)한 것이 어떤 일이며, 아침저녁으로 노고한 것은 어떤 일인가. 셋째, 조령(條令)을 이행하되, 부임한 이래 이행한 것이 어떤 일이며, 판방(板牓)에 걸어 놓고 대중에게 깨우쳐 알게 한 것이 몇 조목인가. 넷째,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지역 내에 제언(堤堰)을 수축한 곳이 몇 곳이며, 부임 후 백성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고하여 매 1호에 몇 그루씩 심었으며, 관(官)에서 심은 뽕나무를 나누어 주어서 심은 것은 매 1호에 몇 그루씩인가. 백성에게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권한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이며, 관에서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인가. 농사를 권장한 것은 몇이며, 온 집안이 병을 앓고 있는 자는 이웃으로 하여금 경작해 주게 하고,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값을 갚아 주게 한 것이 몇인가. 다섯째, 학교를 수리한 것이 몇 간이며, 생도(生徒) 몇 사람 내에서 독서하는 사람이 몇 명이고, 경서를 통한 사람은 몇 명인가. 여섯째, 부역(賦役)을 공평하게 하였으되, 공부(貢賦)의 수렴(收斂)은 어떤 일이 공평하며, 군역(軍役)의 차정(差定)은 어떤 일이 공평한가. 일곱째, 결송(決訟)을 밝게 하여 노비의 송사 몇 건 내에 해결한 것이 몇 건이며, 잡송(雜訟)은 몇 건이었는가 하는 것이었다[『태종실록』 6년 12월 20일].
이 포폄법은 1416년(태종 16) 1월에 부분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미 제정된 법규에서는 각 도의 감사(監司)가 먼저 수령의 전최(殿最)를 마감하지 않다가 도목정(都目政)이 가까워졌을 때에 실적도 기록하지 않고, 다만 상·중·하 세 등급만을 써서 계본(啓本)을 바치는 폐단이 있었다. 그리하여 봄과 여름의 포폄은 6월 15일 이전에, 가을과 겨울의 포폄은 11월 15일 이전에 칠사(七事)의 실적을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 이 항식은 1419년(세종 1)과 1424년(세종 6)에 재확인하였으며, 고만(考滿)된 수령은 3월부터 6월까지의 사이에는 교체할 수 없도록 하였다.
육조속아문(六曹屬衙門)의 관원에 대한 포폄은 처음에는 제조가 담당하였다. 그런데 해당 조에서 포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면서, 해당 조의 당상관이 그 사(司)의 제조와 의논하여 계문하고, 제조가 없는 곳은 해당 조의 당상관이 마감하여 계문하도록 하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육조와 한성부의 낭청(郎廳)을 포폄하는 법을 세웠다[『태종실록』 17년 11월 22일]. 육조·한성부 낭청의 포폄은 각각 당상(堂上)이 하고, 형조도관(刑曹都官) 낭청의 포폄은 겸지조사(兼知曹事)가 하게 하였다. 또한 1423년(세종 5)에는 모든 도감의 관원과 모든 처(處)의 구전 관원(口傳官員)들을 제조로 하여금 포폄하게 하였다[『세종실록』 5년 11월 22일].
이렇게 포폄제는 경·외관을 막론하고 정비를 거듭하여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그 후 이 규정은 포폄의 주체와 방식 및 평가 항목 등에서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신설 기관의 포폄법도 제정되었는데, 규장각의 포폄 방식이 그것이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포폄등록(褒貶謄錄)』 4종을 소장하고 있다. 홍문관과 의정부의 포폄 기록인데, 이 자료를 통하여 포폄의 진행 절차와 평정 방식 등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