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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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오법(束伍法)

서지사항
항목명속오법(束伍法)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임진왜란(壬辰倭亂), 절강병법(浙江兵法), 『기효신서(紀效新書)』, 진관속오지법(鎭管束伍之法), 속오분군법(束伍分軍法), 속오군(束伍軍)
분야정치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중 도입된 명나라 절강병법(浙江兵法)에 의한 군사 편제법.

[개설]
속오(束伍)란 군대의 편제를 의미하는 용어이지만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중 도입된 절강병법에 의한 군사 편제법을 의미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속오법에 의하면 기본 편제인 대는 대장 1인과 군사 10명, 그리고 취사병인 화병 1명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된다. 3개의 대가 한 기, 3개의 기가 한 초, 5개의 초가 한 사를 이루고, 5개의 사로서 한 영을 편성하였다. 이후 조선의 군사 편제의 기본이 되어 중앙의 주요 군영과 지방의 속오군이 모두 이 속오법에 의하여 편성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속오라는 용어는 중국 고대 병서인 『위료자(尉繚子)』의 「속오령(束伍令)」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으로, ‘대오(隊伍)를 단속(團束)’한다는 뜻으로, 즉 군대의 편제를 의미하였다. 조선시대 군사 편제법으로서 속오법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중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을 통하여 새로운 전술 체계인 척계광(戚繼光)의 절강병법이 도입되면서부터이다. 절강병법은 조총과 장도(長刀)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이 아닌 보병 위주의 전술 체계로서, 절강병법이 도입되면서 조선의 기존 군사 편제 및 무기체계 등도 완전히 일신하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기존의 군사체제인 조선초기 오위제에서의 여(旅)-대(隊)-오(伍)-졸(卒)의 조직에 기반한 위(衛)-부(部)-통(統)의 부대 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무기체계도 장창(長槍), 낭선(狼筅), 당파(鏜鈀) 등 이전에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새롭고 다양한 단병기와 신형 화승총인 조총(鳥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명나라에서 도입된 새로운 군사 편제 방식을 임진왜란 중 속오법이라고 불렸다. 속오법에 따라 중앙과 지방의 군사체제의 재건을 추진하여 중앙에 훈련도감을 지방에는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내용]
절강병법의 전술과 군사 편성은 척계광이 지은 병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대는 근접전 군사인 살수(殺手)로 이루어진 살수대와 혹은 조총수인 포수로 이루어 포수대로 구분되었는데, 살수대의 군사는 등패수(籐牌手) 2인, 낭선수(狼筅手) 2인, 장창수(長槍手) 4인, 당파수(鎲鈀手) 2인으로 이루어졌다. 포수대는 모두 조총수 10명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에서는 살수와 포수 이외에 기존의 전통적인 장기였던 궁시(弓矢)를 다루는 궁수(弓手)로 이루어진 사수대(射手隊)를 편성하여 이른바 삼수병(三手兵)을 구성하였다. 중앙의 새로운 군영인 훈련도감이나 지방의 지방군인 속오군은 삼수병 체제에 따라 편성하였다. 속오법에서는 고정된 지휘관과 군사를 편성하여 명확한 지휘 책임과 연좌제에 따라 각 군사들의 연대 책임을 강조하였다. 임진왜란 중 조선은 형해화된 중앙과 지방의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지방군의 조직을 기존의 진관체제(鎭管體制)에 두되 그 조직편제는 속오법에 의하고, 훈련 및 무기 체계는 삼수기법(三手技法)에 따랐다. 따라서 ‘진관속오지법(鎭管束伍之法)’ 또는 ‘속오분군법(束伍分軍法)’ 등의 용어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변천]
속오법에 의한 군사 편성은 1596년(선조 29) 말에는 조선의 전국에서 거의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듬해 초 일본군의 재침 때에는 속오군이 일선에서 실전에 참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속오군은 각 도의 사정에 따라 구체적인 양상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위기를 맞아 응급조치로서 속오군이 편성된 것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전투에서 중요해짐에 따라 속오법에 의한 군사 편성에서 조총병의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병자호란 이후에는 사수와 살수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훈련도감의 경우 17세기 후반이 되면 보병의 경우 사수는 없어지고 포수 20초, 살수 6초로 편성되게 된다. 지방군의 경우에도 병자호란 이후 포수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살수와 사수는 급격히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기효신서(紀效新書)』
■ 『서애집(西厓集)』
■ 『병학지남(兵學指南)』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노영구, 「16~17세기 조총의 도입과 조선의 군사적 변화」, 『한국문화』58, 2012.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집필자] 노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