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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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대비(大王大妃)

서지사항
항목명대왕대비(大王大妃)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내명부(內命婦), 왕대비(王大妃), 왕비(王妃), 왕세자빈(王世子嬪)
동의어자성(慈聖), 자전(慈殿)
관련어왕후(王后)
분야왕실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전전(前前) 왕의 왕비(王妃)가 생존해 있을 때의 존칭.

[개설]
대왕대비(大王大妃)는 중국의 태황태후(太皇太后)의 호를 따라 제후국의 지위에 맞게 고친 존칭이다. 왕대비(王大妃)였다가 당시 왕의 승하로 사왕(嗣王)이 즉위하면 대왕대비로 승차하여 존숭되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왕위 계승이 이루어진다면 전전 왕의 왕비이므로 현왕(現王)의 할머니가 된다. 그러나 왕실의 구성과 위계의 상황에 따라 대체로 가장 어른인 경우 대왕대비가 되었다. 대왕대비는 왕실의 가장 연장자로서 존숭되었으며, 후사왕이 결정이 되지 않았을 경우 사왕을 결정하거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왕실의 가장 연장자였던 대왕대비는 대개 전전 왕의 왕비였던 만큼 3대에 걸친 왕의 재위 기간 동안 왕실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므로 대왕대비까지 승차하였던 왕비는 많지 않다. 최초의 대왕대비는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로서 성종이 즉위한 후 대왕대비가 되었다. 대왕대비는 왕실의 가장 어른이지만 동시에 두 사람인 경우도 있다. 성종대 함께 왕대비(王大妃)였던 소혜왕후(昭惠王后)와 안순왕후(安順王后)는 연산군이 즉위하자 같이 대왕대비로 존숭되었다[『연산군일기』 즉위년 12월 29일]. 대왕대비는 왕의 즉위 순서를 따른다면 현왕의 할머니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명종대 대왕대비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명종의 어머니였으며, 영조대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도 친모(親母)는 아니지만 어머니였다.

대왕대비의 지위는 왕이 즉위하면서 왕대비에서 대왕대비로 높여 존숭하도록 하였으며, 이때 존호가 함께 올라갔다. 또한 국가의 경사, 생신 등을 맞이하면 존호를 올렸으며, 더불어 표리(表裏)를 올리고 진연(進宴)과 같은 잔치를 통해 대왕대비를 존숭하였다.

대왕대비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왕실의 후사왕을 결정하거나 수렴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대왕대비로서 후사왕을 결정한 경우는 헌종 사후 철종을 즉위하도록 한 순원왕후(純元王后)와 철종 사후 고종으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한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있었다. 대왕대비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은 수렴청정이 있다. 미성년의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였던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연장자가 수행하는 것으로 대왕대비의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변천]
대왕대비와 현왕의 관계는 대왕대비가 전전 왕의 왕비였던 만큼 할머니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고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현왕의 할머니였던 대왕대비는 성종대 정희왕후를 시작으로 연산군대 소혜왕후와 안순왕후가 있었다. 소혜왕후는 성종의 어머니였으므로 연산군의 친할머니이지만, 안순왕후는 소혜왕후와 형제의 차서(次序)를 따라 같은 항렬이었던 만큼 연산군의 할머니가 되었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는 15세에 계비(繼妃)가 되었기 때문에 이후 왕실에서 지낸 기간이 길었다. 장렬왕후는 현종의 할머니로서, 숙종의 증조할머니로서 대왕대비의 지위에 있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정조의 할머니로서, 정조가 효장세자(孝章世子)에게 입후되어 즉위할 때,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숭하였기 때문에 이미 정조대에 대왕대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정조는 당시 왕실에 웃전이 없다는 이유로 왕대비로만 존숭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 정순왕후는 순조가 즉위한 후 증조할머니이며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 대왕대비가 되었다. 순원왕후는 헌종이 즉위한 후 아들이었던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익종(翼宗)으로 추숭되자 할머니로서 역시 대왕대비로 존숭되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아니면서 대왕대비였던 왕비들도 있다. 명종대 대왕대비였던 문정왕후는 명종의 어머니였으나 인종과 명종이 형제였기 때문에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 왕의 즉위 순서를 따라 대왕대비가 되었던 것이다. 인조대 대왕대비였던 인목왕후(仁穆王后)는 광해군대 왕대비에서 서궁(西宮)으로 지위가 강등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대왕대비로 존숭되었다. 인목왕후는 인조의 할머니가 되긴 하나 왕의 즉위를 고려하면 광해군이 폐위되었으므로 전전왕이 아니라 전왕의 왕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목왕후의 교지를 받아 광해군 폐위의 명분을 확보하였던 서인들에 의해 대왕대비로 존숭될 수 있었다[『인조실록』 2년 9월 7일]. 영조대 인원왕후는 영조의 어머니이긴 하나 영조의 형이었던 경종비 선의왕후(宣懿王后)가 전왕의 왕비로 이미 왕대비였기 때문에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 대왕대비가 되었다.

19세기에는 헌종과 철종처럼 후사를 결정하지 않고 왕이 승하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대왕대비의 정치적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헌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계승할 후사가 없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증손인 철종을 자신과 순조의 아들로 입적하여 즉위하도록 하였다. 또한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아들을 자신과 익종의 아들로 입후하여 즉위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즉위년 12월 8일]. 이런 경우 순원왕후와 철종, 신정왕후와 고종은 모자 관계로서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는 왕의 어머니이면서 대왕대비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왕위 계승의 대통을 따른다면 두 사람 모두 철종과 고종에게 3세 전왕의 왕비로서 대왕대비가 되었던 것이다.

대왕대비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이었던 수렴청정은 성종대 정희왕후가 최초로 시행하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13세에 즉위하자 20세가 될 때까지 8년간 수렴청정을 한 후 정치에서 물러나는 철렴(撤簾)을 단행하였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자 9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는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이때 수렴청정을 제도적으로 완비하여 수렴청정절목(垂簾聽政節目)으로 명문화했다. 순원왕후는 조선에서는 유일하게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이 8세에 즉위하였을 때 7년간, 철종이 19세에 즉위하였을 때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신정왕후는 고종이 12세에 즉위하자 4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선조대 8개월간 수렴청정을 하였던 인순왕후(仁順王后)는 왕대비로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수렴청정은 대왕대비가 시행하였고, 그런 만큼 수렴청정은 대왕대비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윤발(綸綍)』
■ 『춘관통고(春官通考)』
■ 변원림, 『조선의 왕후』, 일지사, 2006.
■ 임혜련, 「조선시대 수렴청정의 정비 과정」,『조선시대사학보』 27, 2003.
■ 임혜련, 「19세기 수렴청정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집필자] 임혜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