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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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市廛)

서지사항
항목명시전(市廛)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관수품(官需品), 육의전(六矣廛), 난전(亂廛), 사상(私商), 어용 상전(御用商廛), 저자[市], 동시(東市), 서시(西市), 남시(南市), 시전(市典)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한양과 중요 도시에 조성된 상설 점포나 어용상전(御用商廛).

[개설]
전근대 수도 및 주요 도시에 마련된 상설 점포를 뜻한다. 우리말로 물건을 파는 곳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전(廛)과 방(房)이었다. 고려와 조선은 건국 이후 수도의 이모저모를 계획할 때에 시전 설치 계획도 함께 마련하여 추진하였다. 시전은 서울 시민들의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관수품(官需品)을 조달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농민에게 거두어들인 물건 중 사용하고 남은 분량이나 외교관계에서 구입한 물건 가운데 필요 불급한 분량을 매입해 일반 시민들에게 파는 역할도 했다. 시전은 도심 거리 양편으로 죽 늘어서 상설 시장을 형성하였으며, 정부의 관청이 이들을 관리 감독하고, 상세를 거두며, 물가를 조절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는 수도 평양성을 비롯해 국내성과 한성 등 이른바 3경제도(三京制度)가 있었다. 백제 역시 각 지방에 도시가 발달했고, 외관10부(外官十部) 중 도시부(都市部)라는 관청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일정한 상업 기관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에서도 수도 경주에 ‘저자[市]’를 열었다고 했다. 이후 경주에는 509년(신라 지증왕 10)에 동시(東市)가 설치되었고, 695년(신라 효소왕 4)에는 서시(西市) 및 남시(南市) 등이 설치되었다. 동시·서시·남시에는 각각 시전(市典)이라는 기관을 두었다는 것으로 보아 상설시장과 시전 및 이를 관리하는 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919년(고려 태조 2) 개경에 수도를 건설할 때 시전 시설을 함께 마련했다. 시전 건물의 규모나 위치에 관해서는 기록이 별로 없다. 그러나 1208년(고려 희종 4) 대시(大市)를 개축하였는데, ‘개성의 광화문(廣化門)에서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길의 양 길가에 1,008개의 기둥이 있는 연립 장랑(連立長廊)’이었다고 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도성 중심부에 길게 건물을 짓고 그것을 일정한 넓이로 칸을 나눈 다음 상인들에게 빌려주어 장사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개성 시민들의 생활필수품이나 관부의 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상인들은 시전 건물을 빌려 쓰는 대신 정부에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냈다. 경시서(京市署)는 물가 조절과 시전을 보호 감독하였다. 특히 상행위뿐만 아니라 상품의 종류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해, 관에서 허락한 물품 이외에는 임의로 자유매매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조선왕조 성립 이후 시전은 도시 건설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시전 설치는 1412년(태종 12)부터 1414년(태종 14)에 걸쳐 4차례로 이루어졌다. 1차는 혜정교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양편 길에 800여 칸의 행랑이 완성되었다. 2차로는 대궐문에서 정선방 입구에 이르는 길에 420여 칸의 행랑이 지어졌다. 3차로는 종루부터 경복궁에 이르는 길, 창덕궁에서 종묘에 이르는 길, 종루에서 남대문까지 총 1,360여 칸을 만들었다. 4차로는 종묘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길에 시전 건물이 들어섰다.

조선정부는 이 시전을 일정한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공랑세(公廊稅)를 받았다. 『경국대전』에는 시전 상인들이 건물 1칸마다 봄·가을에 각각 저화(楮貨) 20장씩을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전에 대한 세금은 상행위에 대한 과세를 넘어 점차 국역(國役) 부담으로 변화하면서 어용상전인 ‘육의전(六矣廛)’이 발생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시전 상인들은 같은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일정한 동업자 조합을 이루어 자신들의 상권을 보호하였다. 서울 시전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입전(立廛) 즉 비단 상인 조합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입전의 상전 건물은 종로통에 7개의 전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전방은 또 10개의 상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전 상인 조합은 약 70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조합의 업무를 처리하는 60여 평의 넓은 도가(都家)가 있었다. 각 조합에는 대표자로서 조합의 사무를 총괄하는 대행수(大行首), 일종의 평의원과 같은 도령위(都領位)·수령위(首領位) 등이 있었다. 그 밑에 실무직원으로 실임(實任)·의임(矣任)·서기(書記) 등이 있었다. 대행수와 영위는 모두 조합원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일정한 임기를 가진 명예직이었다. 한편 조합원의 자격과 가입 조건은 매우 엄격했고, 가입금도 내야 했다. 조합 구성에 있어서 혈연관계를 중요시하여, 기성 회원의 증손과 외손까지는 회원 자격이 세습된 반면 기성 회원과 혈연적 연고가 없는 사람의 가입은 절차가 대단히 어렵고 까다로웠으며, 많은 가입금도 내야 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강만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출판부, 1973.
■ 고동환, 『서울 상업사』, 태학사, 2000.
■ 오성, 『조선시대 상인 연구』, 일조각, 1989.

■ [집필자] 이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