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상(相)은 고려시대 중국에서 들어왔다. 조선전기에는 제례와 왕이 신하의 노고를 달래기 위해 정월 초하루나 동짓날에 베풀던 잔치인 회례연(會禮宴)에 수반되었던 무무의 주변에 놓였었는데, 조선후기에는 쓰이지 않았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따르면, 상은 악을 보좌할 뿐 아니라 춤추는 사람의 걸음을 절제시켜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상은 춤추는 사람이 진고(晉鼓) 소리에 맞추어, 왼손에 끈을 잡고 오른손의 퇴(槌)로 치면서 연주하였다.
[연원 및 변천]
상은 1116년(고려 예종 11)에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로 대성아악(大晟雅樂)이 전래될 때 상고(相鼓)라는 명칭으로 유입되었다. 조선전기 세종대의 경우 궁중에서 각종 제사를 올릴 때 수반되었던 춤과 회례연을 거행할 때 추는 춤의 하나인 무무에서 활용되었다. 제례 의식에서는 한 개, 회례연에서는 두 개가 쓰였다. 즉 사직 제례의 춤 대열에서는 동쪽에 한 개, 종묘·풍운뢰우·선농·선잠·우사·문묘 제례의 춤 대열에서는 서쪽에 한 개가 설치되었다. 회례연에서는 무무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한 개씩 합이 두 개 진설되었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악현도], [『세종실록』 오례 가례 서례 악현도].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와 『악학궤범』에 의하면 성종대에는 풍운뢰우·선농·선잠·우사·문묘 제례의 무무에만 상이 진설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종묘제례와 회례연의 무무 주위에 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종대와 차별된다.
[형태]
북처럼 생겼는데 가로 길이가 길며, 몸통에 끈이 있다. 『악학궤범』에는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인용하여, 상은 그 형상이 비(鼙) 같은데, 겉은 가죽이고 속에는 겨를 넣고, 받침대에 받쳐놓고 쳐서 악(樂)을 보좌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악학궤범』에 의하면 성종대에 사용된 상의 치수는 통 길이 2자 4치 8푼, 양쪽 가죽 지름 1자 4치 3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