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응(應)이라는 명칭은 큰 북[大鼓] 소리에 응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악서(樂書)』에 설명되어 있다. 진고(晉鼓)를 치면 악생 한 사람이 오른손으로 응의 몽치[椎] 자루를 쥐고서 북소리에 따라 응을 내려 찧는 방식으로 연주하였다. 조선전기에 제례와 회례연에 수반되었던 무무의 주변에 놓였다가 조선후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연원 및 변천]
응은 세종대의 경우 궁중에서 각종 제사를 올릴 때 수반되었던 춤과 왕이 신하의 노고를 달래주기 위해 정월 초하루나 동짓날에 베풀던 잔치인 회례연(會禮宴)을 거행할 때 추는 춤의 하나인 무무에서 사용되었다. 응은 춤추는 사람의 주변에 놓이는 의물의 하나였다. 제례 의식에서는 한 개, 회례연에서는 두 개가 쓰였다. 즉 사직 제례의 춤 대열에서는 동쪽에 한 개, 종묘·풍운뇌우·선농·선잠·우사·문묘 제례의 춤 대열에서는 서쪽에 한 개가 설치되었다. 회례연에서는 무무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한 개씩 합이 두 개 진설되었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악기도설], [『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악현도].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와『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하면 성종대에는 풍운뇌우·선농·선잠·우사·문묘 제례의 무무에만 응이 진설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종묘제례와 회례연의 무무 주위에 응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종대와 차별된다.
[형태]
『악학궤범』에 그려진 응의 모습은 기다란 막대기처럼 생겼으며 몸통 가운데 몽치가 꽂혀있는 형태이다. 성종대 사용되었던 응은 몸통 길이 3자 9치 3푼, 몸통 사면 모서리 5치 9푼, 몸통의 관 두께 6푼, 구멍 지름 2치 2푼, 밖으로 나온 몽치 길이 3치이다. 한편, 중국 문헌인 『주례(周禮)』에는 응의 길이가 6자 5치이고, 『주례도(周禮圖)』에는 그 형태가 원형이고, 안팎 모두 붉은색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