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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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제사직의(親祭社稷儀)

서지사항
항목명친제사직의(親祭社稷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사직제(社稷祭)
관련어납일제(臘日祭), 춘추대제(春秋大祭)
분야왕실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사직제(社稷祭)를 직접 주관하여 거행하는 의식.

[개설]
사직의 정기 제사인 음력 2월인 중춘(仲春)과 8월인 중추(仲秋)에 행하는 춘추대제(春秋大祭) 및 12월의 납일제(臘日祭)에서 왕이 직접 사직단에 거둥하여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민생 안정을 기원하면서 올리는 제사 의식으로, 대사(大祀)의 규정이 적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고려시대의 사직제는 신하들이 대신 제사를 주관하는 섭행(攝行)이 원칙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사직의 제도와 제사 절차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친제(親祭) 의식이 새로 제정되어 『세종실록』 「오례」에 ‘친제사직의(親祭社稷儀)’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친제 사직의]. 이후 성종대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춘추급납제사직의(春秋及臘祭社稷儀)’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편,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는 사직에서의 기고(祈告)를 왕이 주관하는 ‘친제기고사직의(親祭祈告社稷儀)’가 새로 제정되었다.

[절차 및 내용]
춘추대제와 납일제를 기준으로 친제사직의의 절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왕과 제관(祭官)들은 제사 7일 전부터 재계(齋戒)를 시작하였다. 재계는 산재(散齋) 4일, 치재(致齋) 3일을 한다. 산재 기간에는 평소와 똑같이 일상 업무를 수행하되, 술을 마시지 않고 파·부추·마늘 등을 먹지 않으며 조상(弔喪)이나 문병(問病)을 하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형벌을 시행하지 않고 형벌에 관련된 문서를 보고받거나 서명하지 않으며 기타 더럽거나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않도록 하였다. 치재는 산재 이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재계하는 것으로, 이 기간 중에는 전적으로 제사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였다. 왕은 별도의 전각을 지정하여 4일 동안 산재를 실시한 다음, 다시 정전(正殿)으로 돌아와 이틀간의 치재를 실시하였고, 제사 하루 전 사직으로 행차하여 사직의 재궁(齋宮)인 안향청에서 남은 하루의 치재를 하였다. 제관들은 재계에 앞서 의정부(議政府)에 모여 정성을 다해 재계에 임할 것을 맹세하는 ‘서계(誓戒)’를 하였다. 서계를 마친 제관들은 산재 4일 동안은 자기 집의 평상시의 거처인 정침(正寢)에서, 치재 3일 중 2일은 자신이 근무하는 관서에서 잤으며, 마지막 하루는 사직의 재소(齋所)에서 재계를 하였다.

제사 3일 전에는 행사 때 쓸 장막 등을 담당하는 전설사(典設司)에서 사직 내에 왕·세자·제관들의 임시 거처인 막차(幕次)를 설치했다. 제사 2일 전에는 사직단 안팎을 청소하고 제사 음식을 둘 찬만대(饌幔臺)를 설치하며 각종 악기를 배치했다. 제사 하루 전에는 사직신의 신좌(神座)를 단 위에 설치하고, 제사 때에 왕이 서는 자리인 판위(版位)와 여타 제관들이 서는 자리들도 마련했다. 또, 제사에서 사용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도 점검했는데, 희생은 소·양·돼지를 한 마리씩 쓰는 태뢰(大牢)에 양 3마리와 돼지 3마리를 더하여 사용했다. 한편, 제사 전날에 왕이 궁궐에서 나와 사직으로 행차하는 ‘거가출궁(車駕出宮)’ 의식이 거행되었다.

사직제는 축시(丑時) 1각(刻)인 새벽 1시 15분경에 시작되었고, 제사 당일의 준비는 축시 5각 전인 밤 11시 45분부터 실시되었다. 먼저, 축판(祝版)·폐백(幣帛)·제기(祭器)·제수(祭需) 등을 사직단에 배치하였고, 이어 사직신의 위판(位版)을 신좌에 설치하였다. 이어 제관을 비롯하여 제사에 참여하는 관원들이 각자의 정한 위치에 나가고, 마지막으로 왕이 의례를 총괄하는 예의사(禮儀使)의 인도를 받아 제례를 행하기 전 잠깐 멈추어 서는 판위(版位)에 나감으로써 제사 준비가 모두 끝났다.

사직 친제의 진행 과정을 보면, 먼저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제물로 올려진 희생(犧牲)의 털과 피를 묻는 의식인 ‘예모혈(瘞毛血)’이 거행되었다. 이어 영신(迎神), 전폐(奠幣), 진찬(進饌), 작헌(酌獻), 음복(飮福), 철변두(徹籩豆), 송신(送神), 망예(望瘞) 등의 순으로 제사가 진행되었다.

영신은 왕과 제관들이 4번 절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하여 사직신을 맞이하는 의식이다. 전폐는 사직신에게 폐백(幣帛)을 올리는 의식으로, 왕이 단에 올라 국사신(國社神)→후토씨(后土氏)→국직신(國稷神)→후직씨(后稷氏)의 순으로 향과 폐백을 올렸다. 진찬은 소·양·돼지의 익힌 고기를 제단 위에 진설하는 절차로, ‘진숙(進熟)’이라고 했으며, ‘소고기→양고기→돼지고기’의 순으로 진설하였다.

작헌은 사직신에게 술을 올리는 의식이다. 술잔은 모두 3번 올리며, 이를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이라고 한다. 친제에서는 왕이 초헌관(初獻官)이 되었다. 초헌이 끝나면 바로 이어서 아헌과 종헌이 시행되었다. 친제에서 아헌관(亞獻官)은 왕세자가, 종헌관(終獻官)은 영의정(領議政)이 맡았다.

음복은 왕이 직단(稷檀) 위에 마련된 음복위(飮福位)에 나가 복주(福酒)를 마시는 의식이다. 이때 제관들에게 제사 고기를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수조(受胙)’라고 한다. 음복을 마친 왕은 판위로 돌아와 사배를 하였고 다른 제관들도 왕을 따라 사배를 하였다. 철변두는 제단 위의 제기(祭器)들을 거둔다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제기들을 완전히 치우는 것은 아니고 변(籩)과 두(豆) 각 하나씩만 위치를 약간 옮겨 놓았다. 송신은 왕과 제관들이 사배례를 하여 사직신을 전송하는 의식이다. 송신이 끝나면 왕은 판위를 떠나 왕이 머물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장막인 대차(大次)로 돌아갔다. 망예는 제사에서 사용한 축판(祝板)과 폐백을 예감(瘞坎), 즉 구덩이에 묻는 것을 헌관(獻官)들이 관람하는 의식이다. 친제에서는 아헌관인 왕세자가 망예를 주관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박례경, 「조선시대 국가 전례에서 社稷祭 의례의 분류별 변화와 儀註의 특징」, 『규장각』29, 2006.

■ [집필자] 강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