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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전통적으로 겨울이 춥고 눈이 많이 내려야 다음 해의 농사가 잘된다는 관념이 있었다. 기설제는 이런 배경에서 형성된 제사로 눈을 내려줄 것을 기원하였다. 10세기 경 중국의 오대(五代)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현종대부터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기설제는 북방에서 추위를 관장하는 현명(玄冥)의 신을 모시는 사한제(司寒祭)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산악신앙 및 도교에서 별을 향하여 지내는 초제(醮祭)와 연관성이 컸다. 이 때문에 조선초기 국가 사전(祀典)을 정비할 때 그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연원 및 변천]
중국사에서 기설제에 대한 기록은 오대의 국가 중 하나인 후당(後唐)의 폐제(廢帝) 2년(935)에 용문불사(龍門佛寺)에서 시행된 것이 처음이다. 이후 기설제는 청나라 때까지 지속되었다.
고려시대의 기설제는 1016년(고려 현종 7) 뭇 산악[群望]에게 시행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의종대까지 8차례에 걸쳐 시행된 기록이 있다. 이때의 기설제는 태묘(太廟), 사직(社稷), 신묘(神廟), 뭇 산악과 태일(太一) 등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중에서 태일은 도교에서 초제를 지낼 때의 대상이었다.
기설제는 이 같은 도교적인 성격 때문에 조선 건국 후 유교적인 사전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439년(세종 21) 예조(禮曹) 판서(判書) 민의생(閔義生)이 기설제를 지내도록 청하였을 때 세종이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를 지내면 기설과 같은 것인데 굳이 따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있겠느냐.”[『세종실록』 21년 11월 18일]고 반문했던 것은 독자적인 기설제 시행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 기사 외에는 성종대까지 기설제와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없는데, 이러한 무관심의 결과로『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기설제가 수록되지 않았다.
기설제 관련 기록은 중종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타난다. 중종은 기설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여러 차례 제사의 시행을 모색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기설제가 시행된 된 것은 1545년(명종 즉위)이었다[『명종실록』 즉위년 11월 17일)]. 그렇지만 이후 기설제의 시행 기록은 100여 년이 넘도록 보이지 않다가 1669년(현종 10)에서야 다시 나타났다[『현종실록』 10년 1월 3일].
기설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한 왕은 숙종이었다. 1678년(숙종 4)에 처음 사직·종묘(宗廟)·북교(北郊)에서 기설제를 시행하도록 명한[『숙종실록』 4년 12월 6일] 이래 제사를 시행한 기사는 종종 나타난다. 그는 기설제의 대상을 확대하고 효과가 없을 경우 반복해서 제사를 지냈다. 예컨대 1682년(숙종 8) 10월 30일 눈이 내리지 않자 북교(北郊: 현 서울 창의문 밖 근교)에서 기설제를 지냈는데, 그 효력이 없자 11월 29일에 사직단과 종묘, 북교에서 재차 기설제를 지냈다. 그렇지만 이것마저 효과가 없자 12월 16일에는 풍운뇌우산천단과 기우제를 지내는 우사단(雩祀壇), 삼각산(三角山), 목멱산(木覔山), 한강(漢江) 등 다섯 곳에서 3번째로 기설제를 지냈다.
이러한 숙종의 기설제 시행 방식은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속대전(續大典)』에 반영되었다. 『속대전』에서는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을 경우 1차로 종묘·사직·북교에서 기설제를 지내고. 효과가 없으면 2차로 풍운뢰우단과 산천, 우사단, 삼각산, 목멱산, 한강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중에서 삼각산·목멱산·한강에는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근시관(近侍官)을 보내고, 나머지 장소에는 정2품관을 보내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후 기설제는 자주 시행된 것은 아니지만 고종대까지 시행 사례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절차 및 내용]
성종대 편찬된 최초의 국가 예전(禮典)인 『국조오례의』에는 기설제의 의식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숙종대 여러 번 기설제의 시행을 근거로 영조대 편찬된 『속대전』에는 이와 관련된 제사규정이 수록되었다. 그렇지만 영조 연간에 편찬된 예전인『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어찌된 일인지 기설제가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방식은 정조대 편찬된『춘관통고(春官通考)』에 관련 기록이 수록되어 좀 달라졌다. 그렇지만 사한제(司寒祭)를 설명하면서 중종대 이후의 기설제 관련 기사를 덧붙였을 뿐이고, 실제로 시행되었던 의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기설제는 사한제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 목적상 겨울철에 시행되는 기우제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일정한 제단이 마련되지 못한 채 종묘, 사직, 그리고 북교, 풍운뇌우산천단, 우사단, 삼각산, 목멱산, 한강 등 기우제가 시행되는 장소에서 제사가 시행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기설제를 유교적인 제사라기보다는 도교적인 성격을 갖은 의식으로 파악하였고, 산천신앙과 결부하여 파악하였다. 이 때문에 유교적인 사전 속에는 포함되지 않았고, 독자적인 의식이 제시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