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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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단(雩祀壇)

서지사항
항목명우사단(雩祀壇)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국가제단(國家祭壇)
관련어기우제(祈雨祭), 산천단(山川壇),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분야왕실
유형건축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하여 설립한 국가 제단.

[개설]
조선시대의 기우제는 일반적으로 본래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제단에서 일시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우사단은 이와 달리 기우 자체를 목적으로 설립된 제단이다. 고려시대의 우사는 환구단에서 시행된 제사의 한 종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태종대에 처음으로 별도의 제단이 설립되어 전 시기에 걸쳐 운영되었다.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규정된 우사제의 등급은 중사(中祀)이다. 『국조오례의』에서는 우사단에서 신하들이 대행하는 제사 의식만 실려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그 효용성이 크다고 인정되어 영조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왕의 친제 의식이 수록되었다.

[위치 및 용도]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조에 의하면 우사단은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서울시 강동구 강일동에 해당한다.

우사단은 별도의 기능이 없이 기우제를 전담하여 지내는 제단이다. 때문에 4월에 지내는 정기 제사인 우사제(雩祀祭) 외에 가뭄이 심할 때 수시로 지내는 우사단기우제(雩祀壇祈雨祭)가 시행되었다. 『국조오례의』에서는 전자의 경우 정1품관이 주관하고, 후자의 경우 3품관이 주관하도록 규정되었지만, 영조대 편찬된 『국조속오례의』에서는 왕이 참여하는 기우제가 추가됨으로써 전체적인 규모가 커졌다. 우사단의 제사는 가뭄이 심할 경우 종묘, 사직, 북교(北郊: 현 창의문 밖 근교), 풍운뇌우(風雲雷雨), 산천(山川), 성황(城隍) 등 기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제단들과 연결되어 시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변천 및 현황]
중국사에서 우사(雩祀)를 시행하는 장소는 환구단과 우사단 2곳이 병존하였다. 이 중 독자적인 우사단이 설립된 것은 남북조시대의 국가인 남제(南齊)에서 후한(後漢)의 학자인 정현(鄭玄)의 학설에 따라 환구단의 옆에 건립한 것에서 기원한다. 이러한 방식은 수(隋)·당(唐)을 거치면서 역대의 왕조에서 지속되었다.

중국에서의 방식과 달리 고려시대의 우사제는 전적으로 환구단에서만 시행되었다.『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따르면 환구단에서 국왕은 정월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음력 4월인 맹하(孟夏)에 우사제를 지냈다. 실제로 『고려사』에는 환구단에서 우사제를 지낸 사례가 여러 차례 나오고 있다.

우사를 환구단에서 지내는 방식은 조선의 건국 이후에도 일정 기간 이어졌다. 그러다가 환구제가 천자의 의례로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부당하다는 지적이 일어나면서 별도의 제단이 모색되었다. 그 결과 1414년(태종 14) 송나라의 풍사단(風師壇) 제도에 따라 흥인문 밖에 별도의 제단이 세워졌다. 이때의 규모는 높이 3자(약 0.9m), 둘레 33보였고, 신주의 크기는 높이는 2자 2치(약 67㎝), 넓이는 4치 5푼(약 14㎝), 두께는 9푼(약 3㎝)이었다[『태종실록』 14년 5월 14일]. 그러나 제단의 규모는 세종대에 이르러 풍운뇌우, 선농(先農), 선잠(先蠶) 등 여타 중사의 제단과 동일하게 사방 2장 3자(약 6.6m), 높이 2자 7치(약 0.8m)로 조정되었다[『세종실록』 12년 12월 8일], 그렇지만 1472년(성종 3) 우사단의 신위가 많아 제수를 놓기가 어렵다는 의견에 따라 다시 사방 4장(약 12m)의 크기로 확대되었다[『성종실록』 3년 6월 21일]. 성종대에 조정된 제단의 규모는 『국조오례의』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형태]
『국조오례의』 서례에 수록된 우사단은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동일하게 네모진 형태로 사방에 섬돌[陛]이 있었다. 단의 주위에는 담장인 유(壝)가 이중으로 쌓여져 있고, 사방에 문이 있다. 단의 규모는 사방이 4장이고, 높이는 2자 7치이다. 제사위에 설치되는 신위는 구망(句芒), 욕수(蓐收), 현명(玄冥), 축융(祝融), 후토(后土), 후직(后稷) 등의 여섯 개였다. 이같이 풍운뇌우단, 선농단, 선잠단 등 다른 중사의 제단에 모셔지는 신위가 1~3위에 이르는 것과 달리 우사단에는 동일한 신격을 6위나 모셨기 때문에 제단의 규모가 커졌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남제서(南齊書)』
■ 『수서(隋書)』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예기(禮記)』
■ 『명집례(明集禮)』
■ 『홍무예제(洪武禮制)』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김철웅, 『한국중세의 吉禮와 雜祀』, 경인문화사, 2007.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 연구』, 일조각, 199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 한형주, 「성종-중종대 農桑 관련 국가제례의 변화양상과 祭儀」, 『역사와 실학』43, 2010.

■ [집필자] 한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