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의 각종 국가 의례에서 사용된 채색된 작은 가마로서, 의례용 물품을 운반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길례와 가례 의식에서는 시책문을 새긴 옥책(玉冊)이나 죽책(竹冊) 등의 시책(諡冊), 왕의 시호(諡號)를 새긴 도장인 시보(諡寶) 등을 운반하였고, 흉례 의식에서는 무덤에 넣었던 옥과 비단인 증옥백(贈玉帛),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인 지석(誌石), 무덤에 함께 묻을 기물인 명기(明器) 및 의복과 노리개 등의 복완(服玩)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길례·가례 의식에 사용된 채여와 흉례 의식에 사용된 채여는 외관과 제작 방식, 크기, 재질 등이 조금씩 달랐다. 조선시대의 국가 전례서와 주요 의궤에는 대부분 흉례 의식에 사용되는 채여의 그림과 제작 규격, 관련 기사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순조대에 제작된 『순조관례책저도감의궤(純祖冠禮冊儲都監儀軌)』에는 드물게 가례 의식에 사용된 채여의 그림과 제작 규격이 수록되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 즉 1800년(순조 즉위) 2월 2일에 거행된 왕세자의 관례와 책례 당시에 사용된 채여의 그림과 규격을 전해주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해당 채여의 높이는 2자 7치(약 82㎝), 사방의 넓이는 2자 4치(약 73㎝), 채여를 받치는 세로 방향의 2개의 들채의 길이는 각각 11자(약 3.3m), 가로 방향의 2개의 들채의 길이는 각각 5자(약 1.5m)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에 사용된 길례·가례용 채여의 규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흉례 의식에 사용된 채여의 규격과 형태는 역대의 전례서와 다수의 의궤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으며, 조선전기와 후기 간에 큰 변화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관련 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흉례 의식용 채여를 중심으로 채여의 형태와 규격을 상세하게 정리해 보면, 14자(약 4.2m) 길이의 긴 대[長杠] 2개를 설치하고, 그 아래 구름 모양의 발인 운족(雲足)을 붙인다. 그 위에 길이 7자(약 2.1m)의 가로대[橫杠] 5개를 장강에 엇갈려 놓은 후 장강 위 사방에 길이 3자 3치(약 1m)로 대목(臺木)을 댄다. 각 네 모퉁이에 3자 4치(약 1m) 길이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의 끝에는 붉은 칠[朱漆]을 한 방목(方木)을 붙인다. 그 아래로 녹색 칠을 하고 연꽃무늬를 넣은 정판(精板)을 댄다. 덮개는 먼저 배방목(排方木)을 설치하고 걸치는 추녀[彎衝椽] 8개를 붙여 집 모양이 되게 한다. 여기에 죽망(竹網)을 펴고 검은 파랑색인 아청색(鴉靑色) 면포로 덮은 후, 그 위에 붉은 칠을 한 장식[頂子]을 만들어 단다. 봉황의 머리 모양을 새겨 네 모퉁이에 붙인다. 덮개 아래로 홍색과 녹색의 유소(流蘇)를 드리우며, 윗 처마[上簷]와 아래 처마[下簷]를 각각 만든다. 수레 사방에 문[障子]을 만들고, 그 안팎에 모란을 그린 종이를 붙인다. 끝으로 앞면을 양쪽으로 나누어 여닫을 수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