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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의장물 중 왕의 가장 가까이에 배치되고 항상적으로 대동하는 양산과 부채.
[개설]
햇볕을 가리는 양산과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의장물로 사용되어 왔다. 중국에서는 황제 의장에 양산과 부채가 필수였는데, 중국의 의장을 모델로 구성한 조선의 의장에서도 두 가지는 핵심적인 의장물로 등장하였다. 특히 이들 양산과 부채는 산선이란 용어로 통칭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왕 혹은 왕비나 왕세자 등과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는 의장물이고 또 항상 함께 사용되는 의장물이기 때문이었다.
산선은 종류가 여럿이었으며, 각 종류별로 의장에서 쓰임도 달랐다. 햇빛을 가리는 양산(陽繖)의 경우, 황양산(黃陽繖), 홍양산(紅陽繖), 청양산(淸陽繖)의 세 종류가 있었고, 부채인 선(扇)도 황용선(黃龍扇), 홍용선(紅龍扇), 황봉선(黃鳳扇), 홍봉선(紅鳳扇), 청봉선(淸鳳扇), 용선(龍扇), 봉선(鳳扇), 작선(雀扇), 청선(靑扇) 등 아홉 종류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의장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구성이 달라졌고, 또 항상적으로 의장 주인공의 곁에서 움직이는 것들도 있는 반면 일반 의장물과 함께 배치되는 것들도 있어 그 기능이 한결같지 않았다.
먼저 황양산의 경우는 명 황제를 나타내는 황의장(黃儀仗) 구성물 중 하나였다. 조선은 명의 제후국을 표방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의 왕은 명 황제에 대해 스스로를 신하라고 일컫는 존재였다. 이러한 개념은 의례 의식에도 투영되어 명 황제의 생일이나 새해 첫날 등에는 명 황제의 궁궐 쪽으로 절을 하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고, 명나라에서 표전문 등이 도착하면 이에 대해 명 황제를 대상으로 일정한 의례를 행하였다. 이때 조선의 왕궁에는 용정(龍亭)과 함께 황의장을 설치하여 황제가 현재 조선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의식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황의장에는 앞서 말한 황양산과 함께 황용선, 홍용선, 황봉선, 홍봉선 등이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명의 황태자의 경우에도 이러한 의장이 설정되어 있었는데 이를 홍의장이라 불렀다. 홍의장에는 홍양산을 사용하였고, 청봉선과 홍봉선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명의 황제나 황태자를 표현하는 의장물인 황양산과 황용선, 홍용선, 황봉선, 홍봉선, 청봉선 등을 제외하고 조선의 왕과 왕비, 왕세자를 표현할 때 쓰인 의장물은 홍양산과 청양산, 그리고 용선, 봉선, 작선, 청선의 여섯 종류였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홍양산과 청선이었다. 홍양산은 조선 왕의 장에서 항상 등장하는 구성물이었는데, 실제 왕이 존재하는 곳의 바로 앞에 설치되도록 하였다. 즉 근정전 등에서 의식을 펼칠 때는 어좌의 바로 앞에 설치되었고, 대가(大駕)나 법가(法駕), 소가(小駕) 노부(鹵簿) 등 왕의 행차 시에는 왕이 위치하는 바로 앞에 항상 홍양산이 있도록 하였다. 한편 홍양산과 항상 짝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 바로 청선이었다. 청선은 2개가 짝이 되어 움직였는데, 항상 왕의 뒤쪽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즉 근정전 의식의 경우는 어좌의 뒤쪽에 좌우로 설치되었고, 왕의 행차 시에는 왕이 위치하는 바로 뒤에 좌우로 나뉘어 따르도록 하였다.
더불어 홍양산 및 청선과 함께 왕 최측근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용선과 봉선이 있었다. 이들은 근정전 의례 등에서는 왕의 측면에 배치되었고, 노부 행차 시에는 왕의 앞에 배치되었다. 이들 역시 청선과 마찬가지로 항상 2기가 사용되었고, 좌우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결국 조선의 의장 배치 시나 혹은 왕 행차 시 노부에서 왕은 항상 전면의 홍양산 1개와 용선 2개, 봉선 2개 그리고 후면에 청선 2개로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세종실록』에서 산선에 대한 주석에 ‘홍양산 및 용선 봉선 각 2개가 앞에서 인도하고, 청선 2개가 뒤에 따른다’라고 하여 산선의 구성물이 위와 같음을 명확히 하였다.
요컨대 산선이란 용어는 넓게는 조선의 의장물 중 산과 선을 통칭하는 것이라 한다면, 좁게는 홍양산과 용선, 봉선, 청선으로 이루어진 왕 거동 시 항상적으로 대동하는 의장물을 지칭하는 용어였고, 실제 용어의 사용에서는 후자인 협의의 뜻으로 훨씬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협의의 산선은 그 성격상 의장 및 노부의 규모와 상관없이 항상 같은 수가 사용되었다. 즉 홍양산은 1개, 용선과 봉선, 청선은 각 2개씩이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봉선은 의장 규모에 따라 쓰이는 수가 달랐는데, 대장의장(大仗儀仗)-대가노부의 경우에는 8개가, 반장의장(半仗儀仗)-법가노부 경우에는 6개가 사용되었고, 소장의장(小仗儀仗)-소가노부 경우에는 2개가 사용되었다. 8개 혹은 6개가 사용되는 경우에도 2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왕의 전면에 사용되었고, 나머지 6개 혹은 4개는 전정에 배치될 때나 행차 시에 일반 의장물과 똑같이 사용되었다.
한편 청양산과 작선은 왕 최측근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 의장물과 함께 배치되었다. 청양산은 대장의장-대가노부의 경우나 반장의장-법가노부 경우에는 2개가 사용되었고 소가의장이나 소가노부일 경우에는 1개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왕의 의장이 아니라 왕세자 의장일 경우에는 홍양산을 대신하여 청양산이 왕세자 바로 앞에 배치되었다. 즉 홍양산에 비하여 청양산은 한 단계 낮은 의장물이었고, 이에 따라 왕세자 의장에서는 홍양산을 사용하지 못하고 청양산을 사용한 것이었다. 이 경우 왕세자는 청양산 1개와 청선 2개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작선은 대가의장-대가노부일 경우는 10개가, 반장의장-법가노부일 경우에는 6개가, 소장의장-소가노부일 경우에는 2개가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본래 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양산과 부채가 언제 군왕의 의장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당나라의 의장제도를 정리하고 있는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에서는 산선이란 용어가 등장하고 있어, 적어도 당나라 시기에는 이것이 중국 황제의 의장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당개원례』에 등장하는 산과 선은 그 종류가 조선보다 훨씬 많았다. 중국의 의장을 모델로 정비된 고려의 의장은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의 의위조와 노부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도 역시 조선의 산선보다 많은 종류의 산선들이 등장한다. 다만 고려의 경우 홍양산이 아닌 황양산을 사용하였는데, 1301년(고려 충렬왕 27) 고려가 원에 항복한 이후 일시적으로 황양산이 아닌 홍양산을 사용한 일이 있었다가 곧 다시 황양산이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는 원의 황제국에 대해 고려의 의장 제도의 급을 낮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산선은 고려의 산선을 참고로 그 종류와 수를 감하고, 그 격도 황제의 격에서 제후의 격으로 한 단계 낮추어 홍양산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형태]
산과 선의 모양은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양산은 저사(紵絲), 즉 모시를 사용하여 3개의 처마를 만드는데, 일산[蓋]에 비하여는 짧게 만들고 안에 유소(流蘇)를 드리우도록 하였다. 청양산은 청색 저사를 쓰고 홍양산은 홍색 저사를 사용하였다.
봉선은 붉은색 자루를 쓰고 부채의 면은 붉은 바탕으로 앞뒤 면에 각각 2마리씩의 봉황을 그려 넣었다. 용선은 역시 붉은 자루를 쓰고 부채의 면 역시 붉은색인데, 부채 앞뒤로 각각 2마리의 황룡을 그려 넣었다. 청선도 붉은 자루를 쓴 것은 같지만, 부채의 면은 청색이고 별도의 그림이 없다. 청색의 저사를 겹쳐서 선의 가를 꿰매도록 하였다. 작선은 붉은 자루에 부채면도 붉은 바탕이고 앞뒤로 공작 2마리씩을 그려 넣은 형태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산선은 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의장물로 일반 민가나 사대부가에선 거의 사용하지 못하였다. 다만 부채의 경우는 사대부 계층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단오절 등에는 부채 등을 선물하는 풍속이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부채는 의장물로 쓰인 부채등과는 형태와 재질 등이 현격히 다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