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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의 의장기 중 하나로, 인간의 말을 하고 덕 있는 왕이 통치하는 시대에만 나타난다는 백택(白澤)을 그린 기.
[개설]
백택은 중국의 전설상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에 수록된 「백택도(白澤圖)」에 의하면 백택은 사자를 닮은 동물로 말을 잘하며, 황제(黃帝)가 동해의 해변에서 만나 천하의 귀신에 관한 것을 질문하자 이에 대답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한편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겉모습이 사자와 같고 여덟 개의 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는 온몸에 눈과 뿔이 달린 네 발 짐승으로 표현하였다.
각 기록마다 백택의 모습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인 내용으로는 백택은 사람의 말을 이해하며, 세상의 이치에 통달해 있고 영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백택은 성왕(聖王)이 통치하는 시기에만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백택의 이미지 때문에 백택을 그린 문양이나 깃발은 당나라시대부터 의장물로 사용되었는데, 군주의 치세를 과시하거나 혹은 그러한 치세를 이루는 군왕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백택을 그린 백택기는 왕의 의장물 및 왕비의 의장물로 사용되었다. 즉 조선 왕의 가장 큰 규모의 의장인 대장의장(大仗儀仗) 및 대가노부(大駕鹵簿), 다음 규모인 반장의장(半仗儀仗) 및 법가노부(法駕鹵簿)에서 각각 백택기가 2개씩 사용되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소장의장(小仗儀仗) 및 소가노부(小駕鹵簿)에서는 백택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왕비 의장 및 왕세자 의장에서도 각각 백택기가 2개씩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백택기가 의장기로 처음 등장한 것은 당나라시대로 보이는데, 『신당서(新唐書)』권23,「의위지(儀衛志)」에는 당 황제의 의장물로 백택기 2개가 등장한다. 이후 『송사(宋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의 기록에서도 백택기가 황제 의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 황제 의장을 기록한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의 의위조 및 노부조에도 백택기가 보이고 있어, 이미 백택기가 고려 황제의 의장으로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태]
조선시대 의장물의 형태를 기록한 『세종실록』 「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통해 백택기의 모습을 살펴보면, 사각의 깃발에 삼각(三脚)의 화염각을 달고 있다. 깃발은 흰 바탕에 백택과 운기(雲氣)를 그려 넣었고 청색, 적색, 백색, 황색의 네 가지 색깔로 채색하였다. 백택의 모습은 머리와 꼬리에 털이 달려 있고 여타 형태는 호랑이나 표범과 비슷하다. 이러한 백택의 모습은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묘사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인데, 중국 문헌에 나온 백택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있으며, 혹은 뿔을 달고 있기도 하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백택은 왕실의 의장물뿐만 아니라 대군(大君)이 아닌 왕자들 복식의 흉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흉배에 나온 백택은 백택기에 나온 백택과 비슷하게 뿔이 달려 있지 않고 머리와 꼬리에 털이 나 있다. 전체적인 모습도 호랑이와 비슷하게 표현되었다. 백택 문양은 왕실의 의장물로 자주 사용된 것인 만큼, 왕실이 아닌 사대부가나 일반 민가에서는 백택문의 사용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택의 이미지는 중국과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받아들여졌는데, 일본에서 백택은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