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종묘 제향에서 관례(祼禮)를 행할 때 울창주(鬱鬯酒)를 관지통에 따르는 데에 사용하는 제기.
[개설]
규찬은 관례 때 술항아리[彛]에 든 울창주를 담아 신실(神室)의 제상(祭床) 앞에 있는 관지통(祼地筒)에 따를 때 사용하는 제기이다. 관지통은 땅 속에 울창주가 스며들 수 있도록 바닥에 뚫어놓은 구멍이다. 규찬은 이 구멍에 술을 붓기에 적합하도록 손잡이 반대편에 길게 나온 수구(水口)가 있다. 관례는 혼백을 부르는 과정이므로 모든 제사에 통용된 절차가 아니라 인귀(人鬼)에 대한 제향(祭享)에서만 나오는 절차이다.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에서 관례는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 대보단(大報壇), 경모궁(景慕宮), 육상궁(毓祥宮) 등의 제향에서만 행하였고, 규찬 또한 이러한 공간에서만 볼 수 있었다.
[연원 및 변천]
고대 경전에 의하면 관례에 천자는 규찬을 사용하고 제후는 장찬(璋瓚)을 사용하였다. 규찬이란 손잡이가 규(圭)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규는 옥으로 만든 홀(笏)로 위 끝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졌다. 반면 규의 반쪽을 본떠 끝의 한쪽 면만 곡면을 이루고 있는 옥(玉)을 장(璋)이라고 하는데 장찬의 자루는 이와 같은 모양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제후의 예를 따랐지만 규찬이나 장찬의 용어를 관용적으로 사용하였고 제작과 관련된 의궤에서는 용찬(龍瓚)이란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초기에 규찬은 은으로 만든 것과 나무로 만든 것 두 종류가 있어서 전자는 왕이 직접 제사를 올리는 친향(親享) 때 사용하고, 후자는 신하가 대신 집행하는 섭행(攝行) 때 신하들이 사용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송나라 제도를 참조하여 섭행 때 구리로 만든 찬을 사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9년 8월 15일]. 그러나 그 크기와 형태에 관해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세종실록』 「오례」의 제기도설(諸器圖說)에는 ‘규찬’이란 항목이 있고 『주례도(周禮圖)』의 규찬에 관한 설명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천자의 예식에 해당하는 규찬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는 장찬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대보단 제향에서도 제후의 예식을 사용하여 장찬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친향과 섭행 구별 없이 놋쇠로 만든 찬을 사용하였다.
[형태]
규찬의 형태는 손으로 잡는 자루, 술을 담는 용기, 술을 흘려보내는 수구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손잡이 모양은 규(圭)나 장(璋)의 모양과 같고 술 담는 부분은 둥근 접시 같이 납작하며 원형을 이룬다. 술을 따르는 주둥이 부분은 용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용찬이라고도 부른다. 『국조오례서례』에 의하면 자루 부분의 길이가 9치(약 27㎝)이며 두께가 1치(약 3㎝), 너비가 1치 5푼(약 4.5㎝)인데 이것은 제후가 사용하는 장찬의 크기이다. 한편, 받침대가 별도로 있어 제향 때에는 여기에 담아 준상을 차려두는 준소(樽所)에 올려놓는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일반 사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상향 후 모사기(茅沙器)에 술을 부어 관례를 행한다. 그러나 이때에 특별히 울창주를 사용하거나 규찬을 사용하지는 않으므로 규찬은 국가 제사에서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