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향로는 향을 태우기에 편리하도록 바람을 막아주고 열기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고 타고 남은 재가 날리지 않게 해주는 용기이다. 조선시대의 국가 의례에서 향로는 자주 등장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은 제향(祭享) 때이다. 고대 유교 제향에서는 강신(降神)을 위해 쑥과 서직을 태웠지만 송·원대에 이르러 향으로 이를 대신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이를 따랐다. 그리하여 제향 때 반드시 향을 올리는 상향(上香)의 절차를 두었으며, 제상의 앞쪽에 향탁(香卓)을 별도로 설치하고 향을 사르는 향로와 향을 담는 그릇인 향합(香盒)을 같이 준비하였다. 한편, 왕의 행차 때에서 반드시 향정(香亭)에 향로를 싣고 가면서 향을 피웠다. 이때에는 국왕의 행차에 앞서 사악한 기운을 없애고 정화하기 위한 용도였다. 가례(嘉禮)의 행사 때에도 건물의 바깥 기둥 근처에 향로를 두고 향을 피웠는데 이것 역시 벽사와 정화의 의미가 강하였다. 인정전(仁政殿)이나 중화전(中和殿)처럼 건물의 앞쪽 기둥 옆에 대형 향로를 설치하여 국왕의 위엄과 성스러움을 더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향로는 향을 피우기 위한 기능적인 측면 외에도 이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향을 피우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산을 배경으로 신선과 선녀가 등장하는 박산향로(博山香爐)에는 도교적 세계관이 반영되었다면 향을 부처님에게 바치는 최고의 공양물로 간주한 불교에서는 봉헌의 의식에 적합한 병향로(柄香爐)가 유행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에 향은 조상의 혼을 부르고, 왕의 위엄을 알리고 부정한 기운을 막는 도구였다. 이러한 향을 위해 마련된 왕실의 향로는 주로 놋쇠로 만들었으며, 그 모양은 고대 중국의 제기 중 하나인 정(鼎)의 모양을 따르면서도 뚜껑에 용의 머리를 달아 위엄을 더하였다.
[형태]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사용하였던 향로는 고대 청동기의 형태를 모방하여 제작한 고동기형(古銅器形) 향로로, 세 개의 발과 두 개의 귀를 갖춘 정(鼎)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의례용 제기인 정은 원통형인 반면 향로는 배가 볼록한 고복형(鼓腹形)이다. 향로의 목 부분에서 양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두 개의 귀에는 구멍이 있다. 이러한 귀는 고대 정에 뚜껑을 닫고 고정시키기 위해 경(扃)이라 부르는 막대를 걸었던 것이 변형된 것이다. 뚜껑의 가운데에는 용의 머리를 두어 손잡이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위엄을 더했다. 뚜껑이 있는 용향로의 모습은 숙종대에 편찬된 『종묘의궤(宗廟儀軌)』에서 처음 볼 수 있는데 용의 목이 짧아 머리가 뚜껑에 거의 붙어 있는 상태이다. 정조대에 편찬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와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에 나오는 향로에서는 목이 위로 곧고 길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뚜껑에는 연기가 나오는 구멍이 있으며 그 외 부분에는 용의 비늘이나 구름 모양의 무늬를 새겼다. 뚜껑의 하단이나 향로 몸체[爐身]의 입구 부분에 번개무늬[雷文]가 새겨진 것이 많지만 조선후기 향로에는 좋은 일을 상징하는 길상도 나타난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우리나라에 향이 전파된 것은 삼국시대 불교를 통해서이다. 이후 향의 사용이 확산되면서 향로도 중요한 의물(儀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인해 향과 향로의 사용이 고려시대보다 줄었지만 유교 제사의 확산은 국가와 가정에서 향의 사용을 촉진시켰다. 가늘고 긴 선으로 만든 향인 선향(線香)의 보급으로 향로의 사용 역시 줄어들었지만 권위와 문인들의 취향 속에서 향로는 민간에서도 꾸준히 생산되고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