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중국의 고대 제사는 가축을 살해하여 바치는 희생제였기 때문에 희생(犧牲)을 다루고 올리는 절차가 제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희생제의 전통은 중국과 한국의 국가 제사에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국가 제사 중 단오나 추석, 설날 등에 지내는 속제(俗祭)를 제외한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에서는 반드시 소, 양, 돼지 등의 희생을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사 또는 중사 중 국왕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친제(親祭)의 경우 도살한 소의 털[毛]과 핏덩이[血]를 신에게 올렸다. 핏덩이를 올리는 것은 희생을 도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털은 희생이 순색의 온전한 것임을 나타낸다. 모혈반은 이렇게 모혈을 올릴 때 사용하는 쟁반[槃]을 가리킨다.
[연원 및 변천]
고대 중국에서 희생제를 지낼 때 털과 핏덩이를 담는 그릇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남북조 시기 남조(南朝)의 최초 왕조인 송(宋)나라에서부터 질그릇으로 만든 두기(豆器) 모양의 그릇에 담았다. 당나라에서도 모혈을 올릴 때 두(豆)를 사용하였고,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송 신종(神宗) 때부터 모혈을 쟁반에 담았으며, 조선에서는 이를 따랐다. 모혈반은 향을 올리고 폐백을 드리는 전폐례(奠幣禮)의 절차가 끝나면 신위(神位) 앞에 올린다. 성종대에 간행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숙종대에 편찬한 『종묘의궤(宗廟儀軌)』에서 모혈반의 위치는 신위 바로 앞쪽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제상의 오른편 앞쪽, 곧 두의 오른편 남쪽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제상에 올려진 모혈반은 희생의 삶은 고기를 드리는 궤식(饋食)의 절차에 앞서 철거되었다.
[형태]
조선전기에 사용된 모혈반의 모습이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종묘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놋쇠로 만들었고, 지름이 1자 1치(약 33㎝)인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깊이는 1치 3푼(약 3㎝)이다. 아래에 둥근 받침대가 있는데 지름이 7치 8푼(약 24㎝)이고 높이가 2치 2푼(약 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