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신주(神主), 영정(影幀), 성상(聖像) 등과 같이 성스러운 대상을 표상하는 상징물을 받들어 모셔두는 곳.
[개설]
조선시대 유교 제사에서 감실은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감실은 사당 내 구분된 신실(神室)을 가리킨다. 유교 사당은 하나의 건물 안에 조상의 신주(神主)를 세대별로 구분하여 모시기 위해 내부의 한쪽 편을 여러 실로 나누었는데 이때 각각의 신실을 감실이라 하였다. 둘째, 감실은 사당이나 신실 내 신주를 넣어둔 장(欌)을 가리킨다. 사당 내부를 세대별로 분할할 수 없을 때 감실은 신실을 대신한다. 또한 각 신실이 있는 경우에도 제향을 지내지 않을 때 신주를 보관하는 장소로 감실이 활용되었다. 세 번째로 감실은 사당이 없어 생활공간에서 신주를 봉안하는 장(欌)을 가리킨다.
국가 제사에서 감실은 왕실의 제향 공간에서 주로 등장하는데 위 세 가지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사당 내에 신주를 보관하는 장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사당이나 사당의 신실의 북쪽 벽에 신주장(神主欌)인 감실을 설치하여 신주를 보관하였다가 제사 때 신주를 내어 그 앞에 설치된 신탑(神榻)에 올려두고 제사를 거행한 후 마치면 감실에 다시 봉안하였다. 그런데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종묘(宗廟)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 그리고 왕의 사친을 봉안하는 사당인 궁묘(宮廟)에 보이는 감실의 형태는 각자의 공간적 특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종묘에서 감실은 신주장(神主欌)으로도 표현하였다. 선왕(先王)과 선비(先妃)의 신주를 넣는 감실은 종묘 신실의 북쪽 벽 아래에 설치한다. 목재로 만들었으며 장의 크기는 신실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높이가 약 7척(약 2.12m), 좌우 폭은 약 5척(약 1.52m), 전후 폭은 약 3척(약 0.91m) 정도이다. 장의 좌우와 뒷면은 판으로 막았지만 앞면은 상하로 구분하여 아래쪽만 막고, 상단과 하단 사이에 가로로 판을 얹어 신주를 안치할 수 있게 하였다. 위의 지붕은 역(逆)사다리 모양으로 되어 있고 앞쪽에 발을 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감실의 모양은 왕이 앉는 평상인 어탑(御榻)과 어탑 위에 모형으로 만드는 닫집인 당가(唐家)의 결합 형태와 유사하다. 다만 어탑 위 당가를 받치고 있는 기둥 사이에 판자를 막아서 벽으로 만들고 장식을 최소화하여 장의 형태로 단순화되었다. 장의 외부는 붉은 칠[朱柒]을 하고, 내부는 백능화(白菱花)의 무늬를 넣은 종이로 도배하였다. 전면에는 문짝 대신 거북 모양의 무늬로 짠 발을 내려 내부를 가렸다. 신주장의 좌우에는 왕의 시호(諡號)를 새긴 도장인 시보(諡寶)를 보관하는 보장(寶欌)과 시책(諡冊)을 보관하는 책장(冊欌)이 있다. 감실 앞에는 신탑(神榻)이 있어서 제사 때에는 감실에 있는 신주를 내어다 여기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한편 왕의 사친(私親)을 모신 궁묘에 설치된 감실은 북쪽 벽면에 바닥과 떨어져 걸려 있다. 하단 받침대 위로 좌우에 벽면을 만들고 전면은 가운데를 열어두어 신주를 넣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단에 닫집같이 덮개를 얹었다. 종묘의 감실보다 크기가 크며 문양과 색채가 화려하면서도 다양하다.
[변천]
조선전기 종묘에서는 신주를 보관하는 곳을 감실(坎室)이라고 하였다. 이 감실은 벽장(壁欌)의 형태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내용이 자세하지 않다. 그 위치 또한 서쪽의 벽에 설치되어 동향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종묘가 소실된 후 새로 지으면서 북쪽 벽 아래에 남향으로 장을 두어 신주를 보관하였으며 이를 감실(龕室)이라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眞殿)에서도 감실을 두었다. 선원전(璿源殿)과 같은 진전에는 각 실마다 당가를 세우고 오봉병(五峰屛)으로 벽면을 구성하였으며 바닥에는 왕이 정무를 볼 때 앉는 용평상을 설치하고 그 위에 교의(交椅)가 놓여 있다. 이와 달리 재실에 향축(香祝)을 보관하는 장을 감실이라고 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제향에서 향(香)과 왕이 서압(署押)한 축문(祝文)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