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재계는 제사와 같이 성스러운 대상을 가까이할 때 부정한 기운으로 인해 탈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불결한 것을 멀리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정화의식이다. 재계에는 불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멀리하는 소극적인 행위와 일상적인 것을 멈추고 제사에만 전념하는 적극적인 행동이 함께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를 거행할 때에는 헌관(獻官)과 집사자(執事者), 그리고 참여자들은 일정 기간 재계를 해야 했다. 재계의 기간은 국가의 가장 크고 중대한 제사인 대사(大祀)는 7일, 그 다음 격의 제사인 중사(中祀)는 5일, 가장 낮은 등급의 제사인 소사(小祀)는 3일과 같이 제사의 비중에 따라 달랐다. 헌관과 집사자에 임명된 관리들은 재계를 시작하기 전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재계 기간에 지켜야 할 사항들을 숙지하고 어기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서계(誓戒) 의식을 거행한 후 재계에 들어갔다. 재계 마지막 날에는 제소(祭所)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제사를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초기에 재계는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 법식을 따라 3일로 정했지만 1412년(태종 12)에 송나라의 법식을 기록한 『문헌통고(文獻通考)』와 고려시대의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를 따라 대사는 7일, 중사는 5일, 소사는 3일로 정하였다[『태종실록』 12년 12월 29일]. 이러한 규정은 세종대 국가 제사의 각종 의주를 제정할 때 반영되었으며,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도 그대로 실렸다. 모든 재계는 산재(散齋)와 치재(致齋)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예기(禮記)』의 「제의(祭義)」와 「제통(祭統)」에 나오는 구분이다. 산재는 거처를 옮기지 않고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면서 계율을 지키는 것인 반면 치재는 일상적인 업무를 멈추고 거처를 옮겨 제향(祭享)에 전념하는 것이다. 제사에 참여하는 헌관과 집사자들은 재계를 시작하기 전에 서계식(誓戒式)을 의정부(議政府)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서계식은 제사 참여자 관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관원이 주관하였으며 왕이 제사를 주관하는 친제(親祭)라도 국왕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1739년(영조 15)에 영조는 직접 서계식에 나아가 신하들의 서계를 받고, 나아가 ‘친림서계의(親臨誓戒儀)’의 의주를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수록하여 그 의식을 전례화(典禮化)하였다. 친림서계의는 의정부가 아니라 정전(正殿)에서 거행하였다.
한편, 재계의 일수는 조선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변동이 없었지만 그와 관련된 금령 중 벼슬아치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개좌일(開坐日)과 형벌의 사용에 대한 규제는 점차로 줄어들었다. 대사와 중사의 치재일에는 각 관사에서 개좌하지 않았으며 형벌을 사용하지 못하였다[『효종실록』 1년 5월 25일]. 그러나 제향이 늘어나 개좌할 수 없는 날이나 형의 집행을 사용할 수 없는 날이 늘어나면서 공무가 지체되는 폐단이 생기자 점차 치재일에도 개좌하고 형벌을 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절차 및 내용]
재계에 관한 규정은 제사에 참여하는 자에 대한 재계 기간과 장소, 그리고 금기 사항에 대한 것이다. 재계 기간은 대사인 경우 산재 4일·치재 3일이고, 중사에 산재 3일·치재 2일이고, 소사에는 산재 2일·치재 1일이었다. 국왕이 친제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산재 때 별전에 거하고, 치재 때 정전에 거하다 마지막 하루를 재전(齋殿)에 거하였다. 반면 제향 참여자는 산재 때 정침(正寢)에서 거하고 치재 때에는 본사(本司)에 거하였다가 마지막 날 하루를 제향의 장소에서 거하였다. 단(壇)이나 묘(廟)를 수호하는 군인과 공인(工人) 및 무인(舞人)도 본사 또는 예조(禮曹)에서 하룻저녁을 재숙(齋宿)하였다. 재계를 시작하는 날에 헌관과 집사자는 수계식(受戒式)을 거행하였으며 친제인 경우 배제관과 종친과 문무백관도 여기에 참석하였다.
재계 기간에 지켜야 할 사항은, 술을 절제하며, 매운 채소를 먹지 않고, 상가의 조문과 환자의 문병을 가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형벌을 행하지 않으며, 형살 문서에 판결서명하지 않으며, 더러운 일에 참예하지 않는 것 등이다. 조선후기에는 재소(齋所)에서 재계할 때에 술과 함께 담배도 금하였다. 제관과 집사자들은 제사 2일 전에 모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루 전날 새벽에 재소로 나아간다. 이때 한성부(漢城府)에서는 다니는 길을 청소하여 흉하고 더러운 것, 최질의 상복 등을 볼 수 없게 하고, 곡읍의 소리도 재소에 들리지 않게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재계는 유교 제사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 등의 의식을 거행할 때에도 행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도 마을의 제사인 동제(洞祭)나 집안의 제사를 거행할 때에 목욕재계하여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였다. 민간의 자발적 조직과 달리 국가 제사에서 헌관과 집사자들은 권리이면서도 의무적인 조항들이었기 때문에 재계 기간의 규제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영조가 서계 의식에 직접 참여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모범을 보이고 관리들을 규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이욱, 「조선후기 제관(祭官) 차정(差定)의 갈등을 통해 본 국가 사전의 변화」, 『종교연구』53,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