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공신당(功臣堂)

서지사항
항목명공신당(功臣堂)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종묘(宗廟)
관련어공신(功臣), 부묘(祔廟), 위판(位版)
분야왕실
유형건축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역대 국왕들이 재위했을 때 가장 공(功)이 크다고 평가받은 사람들을 봉안한 사당.

[개설]
공신당에 봉안된 공신의 선정 기준에 대해 별도의 문헌은 없으나, 대개 주요 정치적 사건이나 붕당 간의 대립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 선정되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붕당 간의 대립이 치열하여 공신을 선정할 당시 정권을 잡고 있는 조정 신하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 때문에 공신의 선정에 정치성이 매우 크게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종묘 정전(正殿)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공신당은 일명 ‘배향당(配享堂)’이라고도 하는데, 공신을 ‘배향’한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 듯하다. 배향은 한자 그대로 해당 왕과 함께 제사 지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1706년(숙종 32)에 편찬된 『종묘의궤(宗廟儀軌)』・ 1741년(영조 17)년 편찬된 『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에 그려진 ‘종묘전도(宗廟全圖)’에는 건물 위에 ‘배향(配享)’으로 쓰여 있고, 정조대인 1788년(정조 12)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 비로소 ‘공신당(功臣堂)’으로 쓰여 있다.

공신으로 선정되는 사람은 소수였다. 후대에 추가로 배향된 사람들을 제외하면 한 왕 당 평균 3~5명 정도였다. 그리고 배향 공신들의 위차는 관직의 품계보다 공훈의 고하(高下)에 준하여 결정되었다. 공신이 된 이들은 그들 가문에도 영광이었기에 가묘에서도 대부분 사당에 영원히 배향되는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었다. 불천지주란 후대의 왕과 신하들이 친진(親盡), 곧 제사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되는 왕의 공덕(功德)을 평가한 뒤 공덕이 높아 영원히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를 말한다.


고려에서는 종묘에서 체협(祫禘) 제사를 지낼 때 공신을 배향하였다. 체제(禘祭)는 그 나라의 시조에게 지내는 제사이고, 협제(祫祭)는 종묘에 봉안되어 있는 신주만이 아니라 이미 4대를 벗어난 조상까지 함께 지내는 제사이다. 체협 제사는 황제국에서 지내는 제사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지내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왕을 종묘에 부묘(祔廟)하기에 앞서 공신을 선정한 뒤, 죽은 왕의 신주를 종묘 정전에 부묘하는 날에 공신들의 위판(位版)을 공신당에 봉안하였다. 공신으로 선정되면 봉상시(奉常寺)에서 그들의 위판을 만들어 가묘(家廟)에 보내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베풀며 교서를 선포한 뒤 위판에 글을 썼다. 그 후 죽은 국왕의 신주를 실은 가마인 신련(神輦)이 종묘에 나아갈 때 공신의 위판을 실은 요여(腰轝)가 신련 뒤를 따랐다.

공신의 위판은 밤나무로 만들었으며, 위판에는 ‘관직명-시호-이름’의 순으로 썼다. 가령, 헌종의 공신인 이상황(李相璜)과 조인영(趙寅永)의 경우, 이상황은 ‘영의정(領議政) 문익공(文翼公) 이상황(李相璜)’으로, 조인영은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조인영(趙寅永)’으로 썼다.

배향 공신의 제사는 따로 지내지 않고 종묘 제사와 함께 지냈는데, 대신이 섭행할 경우와 왕이 친향할 경우가 달랐다. 섭행할 때는 동향(冬享), 즉 겨울제사만 지냈으며, 친향할 때는 봄·여름·가을·겨울에 지내는 사시제(四時祭)와 동지 후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지내는 납제(臘祭) 모두에 배향 공신 제사를 함께 지냈다.

공신당에 봉안된 공신은 그들의 왕과 운명을 같이하였다. 왕이 불천지주가 되어 종묘 정전에 계속 남아 있으면 공신들도 계속 공신당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의 신주가 종묘 정전에서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지면 배향 공신의 위판도 공신당에서 받들어 내어서 자손에게 돌려보내 각자의 무덤 곁에 묻었다. 그 때문에 현재 공신당에는 종묘 정전에 봉안되어 있는 왕의 공신들만 배향되어 있다.

[변천 및 현황]
처음 공신당을 건립했을 때 건물의 칸 수는 3칸 혹은 5칸이라 하여 문헌마다 기록이 달랐다. 그 뒤 정조대에 이르러 증축한 기록이 있지만 그 규모는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1802년(순조 2)에 정조의 배향 공신을 봉안하기 위해 공신당을 수리할 때 당시 공신당이 6칸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조대에 3칸 혹은 1칸을 증건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조대 이후 증축했음이 분명한데 어느 한 시점에 증축했는지, 오랜 기간에 걸쳐 증축을 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형태]
현재 공신당의 규모는 정면이 16칸이고 측면이 1칸이다. 전면의 중앙부 3칸에는 널빤지로 만든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나머지 칸 위에는 빛이 들고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광창(光窓)을 설치하였다. 옆면과 뒤 벽면은 벽돌[磚壁]로 감싸져 있는 홑치마 맞배집의 구조이다.

[참고문헌]
■ 『종묘의궤(宗廟儀軌)』
■ 『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
■ 『수리소의궤(수본)(修理所儀軌)(手本))』
■ 『춘관통고(春官通考)』
■ 『정조부묘도감의궤(正祖祔廟都監儀軌)』
■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 윤방언, 『조선왕조 종묘와 제례』, 문화재청, 2002.

■ [집필자] 이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