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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국왕이나 장수가 군사 명령을 전달할 때 신표(信標)로서 사용하던 특수한 형태의 화살.
[개설]
조선후기 국왕이나 장수가 군사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던 신표의 하나로서 사방 1척 5촌 크기의 화살로 화살대 중간에 ‘신(信)’ 자가 쓰인 비단 천을 매단 형태였다. 최초에는 영전과 신전의 구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에는 약간 다른 형태를 띠고 사용 시에서 다소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전은 특히 국왕의 거둥 시 명령이나 주요 군영에 대한 군사의 동원, 도성문 등의 개폐 등의 신표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무예별감의 훈련 시에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진영(陣營)을 정돈하고 적군의 첩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신분을 증명할 표신이 필요하였다. 이에 사람을 임명하여 군사 명령을 전달할 때 반드시 그 표신으로 영기(令旗), 영전(令箭), 또는 영표(令票) 중에서 한 가지를 소유한 경우에만 영문(營門)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만일 세 가지 물건 중 하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비록 주장(主將)이 와서 명령을 하더라도 따르지 않으며 진영 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진영 상황을 살피러 다니는 행영(行營) 때나 적군과 대진(對陣)하고 있을 때에는 영기와 영전을 사용하고, 사람을 임명하여 진영 밖으로 보낼 때에는 영표나 영패(令牌)를 발급하여 대조하도록 하였다. 행영하거나 적군과 대진할 경우에는 장수들이 한곳에 모이기가 어려우므로 구두로 명령하는 것을 서로 알릴 수 없어 명령을 전달하고 각 군영의 경계 사항을 알리기 위해 영기와 신전 등을 사용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신전과 영전 사이에 형태상의 구분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세기 초 편찬된 『만기요람』의 「형명제도(形名制度)」조에 영전과 신전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면 신전의 수효는 5개이고 화살촉에 ‘영(令)’ 자를 새겼으며 각각 5색 비단으로 조그마한 표시를 달았으며 각 영에 명령하는 데에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비해 영전은 화살촉이 넓으며 한쪽에는 ‘모영대장(某營大將)’이라고 쓰고 한쪽에는 ‘영’ 자를 쓰며 군중에 명령을 전달하거나 비필 명령을 내리는 데 쓴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신전과 영전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구체적인 구분의 시기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형태]
사방 1자 5치(약 45.5㎝)인데 마름모꼴의 동판 혹은 쇠판으로 된 화살촉에 ‘영(令)’ 자를 뚫어 새겨 화살대 중간에 ‘신(信)’ 자가 쓰인 삼각형의 오색 비단 천을 매달았다.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하면 한 영(營)에 각각 40개씩의 영전을 보유하고서 군중에 명령을 전달하거나 혹은 암호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신전은 손에 들고 다니기도 하지만 활에 걸어 쏘아 명령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조선후기 신전은 다양한 명령 전달 등을 위해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국왕이 거둥할 때 임금의 수레를 따르는 주변의 가후금군(駕後禁軍)이나 가전별초군(駕前別抄軍) 등에게 분부할 일이 있으면 표신과 함께 신전을 사용하여 받들어 행하도록 하였다. 또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의 군사를 동원할 때, 국왕이 거둥하는 중 도성문을 열고 닫을 때 등에도 신전과 표신과 일종의 출입증인 부험(符驗)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국왕의 호위부대인 무예별감(武藝別監)들이 훈련할 때 훈련장에 국왕이 도착하면 국왕이 입장할 것이라는 신호로서 신전을 사격하게 하고, 이후 국왕이 장대(將臺)에 올라가면 신전 등은 장대 앞에 도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