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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원래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이었으나 이후 후궁들의 거처가 되면서 비구니원으로 변모된 궁방.
[개설]
인수궁(仁壽宮)은 원래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인데,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면서 점차 불당으로 변모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명종이 기존의 인수궁을 수리하여 선왕 후궁들의 거처로 삼으면서 인수궁 내에 정업원(淨業院)을 설치하였다. 이후 인수원으로 불리다가 1661년(현종 2) 자수원(慈壽院)과 함께 철폐되었다.
[변천 및 특징]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인수궁은 원래 태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곳이었다. 이후 인수궁은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궁방으로 유지되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태종의 후궁들은 일제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세종실록』 4년 5월 20일], 이때부터 인수궁은 비구니가 된 왕실 여인들의 궁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수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516년(중종 11) 중종이 이명필(李明弼)의 집을 인수궁과 서로 바꾸어 질병가(疾病家)로 삼으라고 명한 기사이다[『중종실록』 11년 1월 9일]. 질병가는 왕실의 후궁이나 나인 등이 병이 들었을 때 요양을 하는 시설을 말한다. 이 기사를 통해 인수궁이 왕실 비빈들의 피접처(避接處)로 이용돼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수궁은 문정왕후의 섭정기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1545년(명종 즉위) 인수궁을 중창하면서 연산군에 의해 폐사된 정업원을 인수궁 내에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였다[『명종실록』 1년 7월 26일]. 인수궁의 중창은 사실상 비구니원의 설치를 위한 토목 공사였기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은 인수궁 토목 공사를 중지할 것을 줄기차게 호소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인수궁 공사를 예정대로 강행해 1551년(명종 6) 정업원 터에 인수궁을 완공하고, 인수궁의 부속 불당을 정업원이라 칭하였다.
조정 신료들의 반대 속에 완공된 인수궁은 이후 왕실 비구니원으로 기능하면서 유생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에는 유생들이 인수궁에 불을 지르려다 적발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21년 4월 20일]. 선조가 즉위한 직후에도 유학자 관료들은 인수궁의 혁파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선조는 대왕대비인 인종비 인성왕후와 대비인 명종비 인순왕후가 반대한다는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절했다. 한편 1574년(선조 7) "처음에는 이름을 인수궁이라 하였다가 그 뒤에 정업원으로 불렀다."[『선조실록』 7년 5월 20일]는 기록으로 볼 때 선조대에는 인수궁이 아예 정업원으로 칭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수궁은 임진왜란의 발발 후 불에 타 없어졌는데, 이후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인수궁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조선전기의 인수궁 건물은 사라졌지만 비구니원으로서의 인수궁은 계속 유지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인수궁 비구니들은 창덕궁 인근에 초막을 짓고 인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이후 인수궁은 1661년(현종 2) 자수궁과 함께 혁파되었다. 현종은 비구니원으로 출가한 왕실 비빈이 한 명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거하도록 명했다[『현종개수실록』 2년 1월 5일]. 인수원과 자수원이 철폐되면서 인수원의 자재는 옮겨다 질병가를 짓는 데 사용하도록 하고, 자수원의 재목과 기와는 성균관의 학사를 수리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윤6월 14일]. 이때는 인수궁 대신 인수원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수원’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은 이때의 기록이 유일하다. 또한 조선후기의 승려인 백곡처능이 현종에게 올린 상소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에서도 인수원과 자수원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처능은 「간폐석교소」에서 두 비구니원의 철폐를 반대하며 억불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인수궁은 선조대 이후 정업원으로 불리다가 점차 인수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