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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조선시대에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軍役)의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승려가 되면 군역이 면제되기 때문에 이를 목적으로 출가(出家)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군정(軍丁)을 확보하고 불교의 교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도첩제를 시행하였다.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일정한 금액의 면포(綿布)나 베, 금전 등을 군역을 면하는 대가로 납부하고 승려의 인가증인 도첩(度牒)을 발급 받도록 한 것이다. 이때 납부하는 재물을 ‘장정(壯丁)이 납부하는 돈’이라는 뜻에서 정전(丁錢)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정전을 납부하고 도첩을 받는 제도는 조선 태종 때 시작되었다. 태조는 1392년(태조 1) 승려가 되려면 양반은 포(布) 100필, 서인은 150필, 천인은 200필의 정전을 납부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24일].
도첩제는 정전의 유무에 따라 납정전급패법(納丁錢給牒法)과 시재행급첩법(試才行給牒法)으로 구분된다. 납정전급패법은 신분에 따라 각각에 해당하는 정전을 바치면 도첩을 발급해 주는 것으로, 도첩제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이다. 그에 비해 시재행급첩법은 불교 경전과 덕행 등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도첩을 발급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도첩제는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시행과 폐지가 반복되었다. 정전을 납부하고 승려가 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등 제도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변천]
정전은 도첩제의 변천과 맥락을 같이한다. 도첩제가 개정될 때마다 정전의 품목 또는 액수도 변하였다.
1408년(태종 8) 무렵 도첩을 받은 승려는 5,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승려의 수가 10만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첩승의 비율은 매우 미미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도첩을 받지 못한 무도첩승을 구제하기 위해, 1403년(태종 3) 2월 11일 이전에 출가한 무도첩승에게는 정전을 면제하고 도첩을 주는 제정전급첩법(除丁錢給牒法)을 시행하였다. 그 뒤 1412년(태종 12)에는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기 위해, 정전으로 납부하는 오승포(五升布) 100필을 저화로 대신하게 하였다[『태종실록』 12년 6월 15일]. 1416년(태종 16)에는 다시 기한을 정하여 승려가 되려는 양민과 천인의 정전 납부를 면제해 주었다.
세종은 불교 종단을 기존의 7종에서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하고, 공인 사찰을 242개소에서 36개소로 정리하는 등 억불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도첩제의 정전 납부를 엄격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군역을 회피하려는 백성들에게 정전 액수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도첩제는 실효가 없었다. 그러자 1429년(세종 11)에 준역급첩제(准役給牒制) 등을 시행하여, 흥천사(興天寺)와 태평관(太平館)의 건립 공사에 참여한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세종실록』 11년 2월 3일]. 정전을 납부하는 대신 노역을 하도록 한 것이다.
사실 도첩 없이 승려가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수행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도첩제를 아예 무시하고 입산하거나, 죽은 사람의 도첩을 구해 그 사람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1432년(세종 14)에는 예조의 청에 따라, 승려로 하여금 소재지 관청에 등록하도록 하고, 도첩의 유무를 철저히 조사하여 무도첩승 가운데 46세 이상은 정전을 징수한 뒤 도첩을 발급하고 45세 이하는 모두 환속시키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4년 9월 1일]. 그러나 이 역시 일시적인 조처에 지나지 않았다. 정전을 납부하고 도첩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 승려는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세종은 1445년(세종 27)에 다시 정전 납부를 강화하기 위해 정전의 품목을 오승포 대신 당시 많이 유통되던 정포(正布) 30필로 바꿨고, 4년 뒤에는 다시 정포 20필·면포 15필로 조정하였다.
문종 연간에도 무도첩승의 존재는 여전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1451년(문종 1)에는 연말을 무도첩승의 자수 기간으로 정하고, 정전을 납부하면 도첩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처벌 없이 환속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군역을 피해 출가한 사람이 스스로 찾아와 정전을 납부하거나 환속해 군역을 맡도록 하겠다는, 비현실적인 탁상행정에서 비롯된 방안이었다.
이후 세조 연간에는 교종과 선종의 본산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한 뒤 포 30필을 정전으로 납부하도록 하였다. 당시 승려의 공식적인 출가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승려가 되려면 먼저 교종 또는 선종의 종단에 등록한다. ② 종단에서는 『금강경』·『반야심경』·『살달타(薩怛陁)』의 암송 능력을 시험한다. ③ 시험에 합격한 사람 가운데 승행(僧行)이 좋은 자를 선발하여 예조에 도첩을 신청한다. ④ 예조에서는 정전으로 포 30필을 징수하고 도첩을 발급한다. 여승의 경우도 동일한데, 다만 정전은 징수하지 않았다[『세조실록』 7년 3월 9일]. 이러한 구체적인 지침에도 불구하고 승려의 출가는 도첩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1492년(성종 23)에는 도첩제를 폐지하여 출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였다. 1541년(중종 20)에는 도첩제 대신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을 시행하였다. 승려를 가장한 군역 기피자 또는 도첩이 없는 승려 등이 일정한 국역을 이행하면 도첩과 호패를 발급해 주는 제도였다. 도첩제는 이후 1550년(명종 5)에 다시 시행되었으나, 1566년(명종 21)에 폐지된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승인호패법 역시 1610년(광해군 2) 다시 시행되었다가 1612년(광해군 4)에 폐지되었다.
정전은 도첩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도첩제의 목적이 정전을 부과하여 군역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민과 천인 신분의 출가자들에게 정전은 큰 부담이었기 때문에 대다수는 정전을 납부하지 않고 무도첩승으로 남아 있었다.
[참고문헌]
■ 김영태, 「조선전기의 도승 및 부역승 문제」, 『불교학보』32, 1995.
■ 이봉춘, 「조선초기 배불사 연구-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 이승준, 「조선초기 도첩제의 운영과 그 추이」, 『호서사학』29, 2000.
■ 이재창, 「조선시대 초기의 불교정책」, 『한국불교사의 제문제』, 우리출판사, 1994.
■ 황인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도첩제의 시행과 그 의미」, 『보조사상』22, 보조사상연구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