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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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재(羅漢齋)

서지사항
항목명나한재(羅漢齋)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오백성재(五百聖齋)
관련어아라한(阿羅漢), 나한전(羅漢殿), 응공(應供), 복전(福田), 응진전(應眞殿), 팔상전(捌相殿)
분야문화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재앙의 소멸을 빌기 위해 나한에게 공양을 올리고 승려에게 재를 올리는 불교 의식.

[개설]
불교에서 나한(羅漢)은 수행 끝에 번뇌의 속박을 벗어난 성자인데, 석가모니 입멸 이후 미륵부처가 오기 전까지 속세에 머물면서 세상 사람들의 소원을 성취하게 해주는 성자이다. 그런 까닭에 불자들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나한에게 공양을 올리고 소원을 빌어 왔는데, 이 의식이 나한재(羅漢齋)이다.

[연원]
나한은 아라한(阿羅漢, Arhan)의 줄임말로 중생들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 하여 응공(應供), 복의 씨를 뿌릴 만한 밭이라고 하여 복전(福田)이라고 한다. 아라한의 성자에는 16나한·500나한이 있으며, 이들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 응진전, 팔상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베풀어지는 재공 의식을 오백성재·나한재라고 부른다. 16나한은 불가의 제자 가운데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일컬으며, 500나한은 부처가 열반한 뒤 가섭이 부처의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에 모였던 제자 500명을 말한다. 16나한 가운데 빈두루존자를 홀로 모시기도 하는데, 그 전각을 독성각이라고 한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우리나라에서 나한재가 시작된 공식적인 첫 기록은 1051년(고려 문종 5) 문종이 개성의 보제사에 행차하여 개설한 오백나한재이다. 이후 고려 때는 28회의 나한재가 개설되어, 가뭄에 비를 빌거나 배반한 도적을 섬멸하기를 발원하였다.

(2) 조선시대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국가에서 설행한 나한재는 2회에 그쳤다. 1402년(태종 2)에 상왕 정종이 경기도 장단의 화장사에서 베푼 나한재와[『태종실록』 2년 1월 16일], 1422년(세종 4)에 호조 판서 신호(申浩)길상사(吉祥寺)에 보내어 베푼 나한재(羅漢齋)[『세종실록』 4년 5월 6일]가 그것이다. 이 2번의 나한재는 태상왕 이성계의 쾌유를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국행 나한재는 수륙재와 기신재 등 불교의 모든 국행 의식이 혁파되는 과정에 자취를 감췄지만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더욱 폭넓게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조선이 건국되기 전, 함경도 안변 석왕사에서 무학 대사가 이성계를 만나 왕업을 축원하기 위해 오백성재를 개설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에 이성계가 석왕사에서 3년간 오백성재를 개최했다고 전해진다.

나한재는 천가지 재앙을 소멸하고 만가지 복덕을 성취하고자 할 때 주로 베풀어졌다. 지장신앙이나 관음신앙은 주로 망자의 명복을 비는 내세적 역할이 강한 반면 나한신앙은 재앙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는 현세적 신앙으로 일찍부터 성행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전국에는 독성기도처로 유명한 곳이 많다.

[절차 및 내용]
불교의 모든 의식은 맨 처음 도량의 경계를 맺는 결계 의식과 정화 의식이 진행된다. 이를 위해 물을 뿌리는 쇄수 행위, 게송과 진언 염송이 행해진다. 주변 정화와 함께 의식을 집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정화 의식을 행하고, 단을 열어 세우고 난 다음 요령을 흔들어 청하는 게송과 진언 이후 널리 청하는 진언이 행해진다.

이어 공양을 올리게 된 연유를 밝히는 유치문(由致文)을 낭송한다. 유치문의 내용은 대체로 공양을 올리기로 한 분의 서원을 밝히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깨끗한 향단을 차렸다고 아뢴다. 유치문 낭송은 원래 재를 올리는 재주가 행하는 의식이지만 후대로 올수록 의식을 주관하는 스님이 낭송하게 되었다.

유치에 이어 청하는 말이 이어진다. 나한의 증명 삼성이 되는 석가모니와 미륵보살, 제화갈라(디팡카라)보살을 청하여 증명으로 삼고 16나한을 일일이 소청(召請)한다. 각각을 청할 때마다 노래로 찬탄하는 가영을 하고 대중은 ‘이러하므로 저는 일심으로 귀명정례합니다[故我一心歸命頂禮]’라고 하며 절을 하게 된다. 귀명정례한다는 것은 온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하여 부처의 발에다 머리를 대고 절을 한다는 뜻이다. 소청이 끝나면 자리를 바치는 헌좌(獻座) 게송과 진언을 염송하여 자리에 앉기를 권하고 이어 공양을 권하는 의식이 행해지고, 『능엄경』의 능엄주 등을 읽어 외우는 풍경 의식이 끝나면 소원을 아뢰는 축원을 한다.

마지막으로 청한 성중을 받들어 보내는 봉송 의식을 끝으로 하여 재 의식이 끝나게 된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나한신앙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산신·칠성과 결합한 삼성신앙으로 승화되어 현재까지도 사찰에서는 이 세 성인을 삼성각이라는 한 전각에 모시고 있는 경우가 많다. 원래 독성·산신·칠성은 각각 독립된 전각에 봉안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참고문헌]
■ 『청문(請文)』
■ 『설봉산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
■ 『권공제반문(勸供諸般文)』
■ 박세민 편, 『한국불교의례자료총서』1, 보경문화사, 1993.

■ [집필자] 이성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