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분수승(焚修僧)은 대개 사찰의 향각(香閣)에 거처하며 기도를 전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불교 사상 및 신앙을 원천적으로 탄압하였기 때문에, 기도나 수행에 전념하는 승려들은 사회적·경제적인 면에서 생산적이지 못하고 재물을 낭비한다는 구실로 비난을 받았다.
[내용 및 특징]
사찰에는 전체를 관리 감독하는 주지뿐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맡은 승려가 존재하는데, 분수승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일반인들에게 보시를 권하는 권화승(勸化僧)이나 상가(喪家)를 찾아가 옷과 끼니를 해결하는 승려 등과는 다른 부류로 간주되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청정과욕(淸淨寡慾)을 근본으로 삼고 승당(僧堂)에서 수심(修心)하는 승려를 상급으로 인정하였는데, 분수승이 바로 여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관료들은 불교가 오랑캐의 도(道)이며 불도(佛徒)는 무위도식하는 쓸모없는 존재라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국태민안과 왕실의 안녕을 빌었던 내원당(內願堂)과 정업원(淨業院)을 혁파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예컨대 1412년(태종 12) 사간원에서는, 왕실 비구니원인 정업원이 하는 일도 없으면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매달 분수(焚修)의 요(料)를 받는다고 비판하였다[『태종실록』 12년 7월 29일].
성종대에는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원각사의 분수승에게 주는 여러 물건을 각 관청에서 상납하게 하라고 간언하였다[『성종실록』 9년 4월 21일]. 장령(掌令) 김제신(金悌臣) 역시, 하늘이 내린 성군인 세종조차 말년에 부처를 좋아하는 누(累)가 있었음을 지적하고는 그 뿌리를 끊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분수승을 대접하는 것은 이미 선왕조(先王朝)부터 있어 온 일이므로 선례에 따라 지속할 뜻을 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