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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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총섭(都摠攝)

서지사항
항목명도총섭(都摠攝)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 의승장(義僧將), 남한치영(南漢緇營), 북한치영(北漢緇營), 의승군(義僧軍), 승영(僧營)
분야문화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임명한 승려의 최고 직위.

[개설]
도총섭(都摠攝)이라는 명칭은 고려후기의 문헌에도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다만 조선전기의 경우 조정 신료와 유학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임명된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총섭은 승군(僧軍)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전란이 끝난 뒤에는 산성을 수호하고 각종 국가적인 토목 공사에 동원된 승려들을 관리 및 감독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조직된 승군제도는 도총섭 아래에 각 도마다 2명씩 총 16명의 총섭을 두어 승군을 관장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도총섭이 단 1명에 국한되었으나, 전란 후에는 도총섭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인조대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승장을 각각 도총섭으로 임명했으며, 정조대에는 해남 대흥사, 묘향산 보현사, 수원 용주사 등에 총 6명의 도총섭이 있었다. 그 후 석왕사, 유점사, 해인사, 법주사 등 4대 사찰의 주지들도 도총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도총섭의 수가 증가하면서 오히려 도총섭의 역할은 점차 사라졌고, 총섭이 승군의 실질적인 통솔자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도총섭은 불교계 내부의 승직이라기보다는 국가에서 임명하는 직역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예컨대 문종대에는, 세종 말년에 왕을 도와 복천사(福泉寺) 중수와 내원당(內願堂) 건립 등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佛事)를 진행한 승려 신미(信眉)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당시 신료와 유학자들이 "국조(國朝) 이래로 이러한 승직이 없었다."고 비판한 것으로 보아 도총섭이라는 명칭이 문종대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도총섭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대부터이다. 선조는 휴정(休靜)을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에 제수하여, 전국 각지의 승군을 모집하고 통솔해 왜적의 침입에 대항하게 하였다. 휴정이 머물렀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팔도십육종도총섭지문(八道十六宗都摠攝之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를 계기로 보현사가 팔도십육종의 본산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609년(광해군 1)에 삼척부사 윤청이 관원의 엄한 처벌에 대해 사헌부에 요청한 글에서 보면 "대체로 도총섭은 바로 난리 초에 비변사에서 품지하여 승장(僧將)에게 내려 준 칭호"[『광해군일기(중초본)』 1년 11월 26일]라는 내용이 나타난다. 이처럼 도총섭은 임진왜란 당시 팔도에서 모집된 승군을 지휘 통솔했던 승군의 우두머리 1명에게 내려 준 칭호였다. 당시 도총섭의 밑에는 8도마다 2명씩, 16명의 총섭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1602년(선조 35)에는 휴정의 제자이자 전란 중에 군량미를 조달한 공적이 있는 의엄(義嚴)이 그 대를 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도총섭은 주로 산성의 축조와 방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도총섭이 전국의 승군을 통솔하는 1인이 아니라 각 지역의 승려들을 관창하는 다수로 전환되었다.

1624년(인조 2)에는 각성(覺性)을 팔도도총섭으로 삼아, 승려를 모집하고 통솔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하도록 하였다. 이후 남한산성의 개운사(開運寺)와 북한산성의 중흥사(重興寺)에 각각 도총섭을 두었다. 또한 북한산성의 승영(僧營) 조직을 총괄한 승대장(僧隊長)은 팔도도총섭을 겸하기도 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고 도총섭을 두었는데, 이는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호하는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해남 대흥사에도 표충사수호겸팔도규정도총섭(表忠祠守護兼八道糾正都摠攝) 1명을 두었다.

이처럼 도총섭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승군을 지휘하였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관할 지역의 사찰과 승군에 대한 통솔권을 행사하였다. 도총섭은 불교계에 미치는 영향이 컸던 만큼 명망 있는 승려가 임명되었다. 각성의 뒤를 이어 남한산성의 도총섭이 된 회은(悔隱)은 각성의 문인(門人)이었다. 초기에는 스승에서 제자로 계승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후 점차 산성 내에서 임명되는 원칙이 세워지게 되었다. 예컨대 북한산성의 도총섭 성능(聖能)이 30년에 걸친 임기를 마치고 직위를 물려준 후임 서윤(瑞胤)은 북한산성 승영(僧營) 출신의 승장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 『남한지(南漢誌)』
■ 『북한지(北漢誌)』
■ 권상로, 『조선사찰사료』,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영태, 「조선시대의 승장에 대하여」, 『불교어문논집』2, 불교어문학회, 1997.
■ 여은경, 「조선후기 산성의 승군총섭」, 『대구사학』32, 대구사학회, 1987.

■ [집필자] 오경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