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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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승(度僧)

서지사항
항목명도승(度僧)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도승첩(度僧牒), 도첩(渡牒), 도첩제(度牒制),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 승록사(僧錄司), 정전(丁錢), 부역승(賦役僧), 승과(僧科), 승역(僧役), 공명첩(空名帖)
분야문화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신분증명서인 도첩을 받은 승려.

[개설]
도승(度僧)은 도첩(度牒)을 받은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 이와 관련된 법을 도승법(度僧法) 내지 도첩제(度牒制)라고 한다. 고려말기부터 시행된 도첩제는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국가 노동력의 원천인 양역(良役) 자원을 확보하려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초기에 들어서는 출가하려는 사람에게 엄격한 기준과 자격을 적용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이 강화되기도 혹은 약화되기도 하였으며, 도첩제가 폐지되기도 하고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변천]
고려말기부터 시행되어 온 도승에 관한 법률, 즉 도승법은 조선 건국을 계기로 한층 강화되었다. 불교의 사회적·경제적 폐단을 줄이기 위해 태조는 1392년(태조 1) 9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에 따라 양반, 양인(良人), 천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둔 정전(丁錢)을 납부해야만 도첩을 주어 출가를 허락하도록 하였다. 태종대에는 법률이 더욱 엄격해졌다. 1408년(태종 8)에는 양반 자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임의로 삭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양반 자제가 승려가 되려 할 경우 부모와 친족이 먼저 사유서를 작성하여 승록사(僧錄司)에 신고하도록 하였다. 이후 예조를 거쳐 왕에게 보고하고 교지(敎旨)를 받은 뒤 정전을 납부해야만 도첩을 발급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8년 5월 10일].

1410년(태종 10)에는 도첩이 없는 승려를 일제히 환속시키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조정에서는 승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였지만, 세종·세조·성종대에는 크고 작은 토목 공사에 승려를 동원해 부역을 시키고 그 대가로 도첩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세조 연간에는 1460년(세조 6)에 출가와 도첩 지급의 기준을 마련하였는데, 이전에 비해 그 기준이 완화되었다. 먼저 승려가 되려는 자는 시험일 3개월 전에 선종(禪宗)이나 교종(敎宗)에 신고한 다음, 시험일에 불경 암송 시험을 치른다. 시험에 합격한 뒤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군역을 면제하는 대가로 정전을 납부하게 하고 도첩을 발급해 주었다.

성종은 세조 연간에 호패법을 재시행하면서 함께 실시한 승인호패법(僧人號牌法)을 1469년(성종 즉위)에 폐지하였으며, 1492년(성종 23)에는 도첩제를 폐지하여 출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였다. 승인호패법은 1541년(중종 20) 도첩제를 대신하여 부활하여 시행되었는데, 1550년(명종 5)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책의 일환으로 도첩제가 다시 시행되면서 승인호패법은 자연히 폐지되었다. 명종대에 재시행된 도첩제는 문정왕후가 사망한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에 다시 폐지되었다. 이후 1610년(광해군 2) 승인호패법이 다시 시행되다가 1612년 폐지되었다.

광해군대에 승인호패법을 다시 시행한 것은 임진왜란 직후 군역을 확보하기 위해 승려 출가를 제한한 조치였다.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은 출가 연한에 따라 호패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승인호패법을 다시 시행했다. 승려의 출가 연한에 따라 호패를 달리 지급한 것은 똑같은 호패를 지급할 경우 군역을 피한 무리들이 몰려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11월 12일]. 하지만 1612년(광해군 4) 호패법의 폐단이 많다는 의견이 제기돼 그 시행이 중단됨에 따라 승인호패법 또한 폐지되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4년 7월 9일].

1624년(인조 2)에는 군량미를 바친 승려에게 도첩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1669년(현종 10)에는 도첩 지급의 기준이 폐지된 지 오래여서 일반 백성들이 각종 부역을 피해 승려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시 도첩제를 시행하였다.

이처럼 승려의 수를 제한하기 위한 도첩제는 수차례 시행과 폐지를 거듭했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제도 자체가 거의 유명무실해지다시피 하였다. 이는 양란 이후 국가의 불교 정책이 크게 우회한 데에 기인한다. 양란 이후 조선 정부의 불교 정책은 승려가 되는 길을 억제하는 방향이 아니라 승려들을 국역 체계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선회되었다. 각종 토목 공사와 산성 수호 등에 승려들을 대거 투입시키면서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도첩 혹은 공명첩을 지급함으로써 무상으로 노동력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승려들은 일정한 국역을 지는 대가로 도첩을 지급받았고, 국가는 피역지민(避役之民)으로 분류되던 승려들의 노동력을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군공(軍功)을 세우거나 국가적인 토목 공사에 참여한 승려들에게 도첩 혹은 공명첩을 지급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안계현, 『한국불교사연구』, 동화출판공사, 1982.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김영태, 「조선전기의 도승 및 부역승문제」, 『불교학보』32,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995.
■ 이봉춘, 「朝鮮初期 排佛史 硏究 : 王朝實錄을 中心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 한우근, 「여말선초의 불교정책」, 『서울대학교논문집』6, 서울대학교, 1963.

■ [집필자] 오경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