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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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曹溪宗)

서지사항
항목명조계종(曹溪宗)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선종(禪宗)
관련어구산선문(九山禪門), 선교양종(禪敎兩宗), 선적종(禪寂宗), 승록사(僧錄司), 오교구산(五敎九山), 오교양종(五敎兩宗), 천태종(天台宗), 혜능(慧能), 조계산(曹溪山), 남종선(南宗禪)
분야문화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태종대 11개 불교 종파 중 하나로, 선종을 대표하는 불교 종파.

[개설]
조계종(曹溪宗)은 고려후기에는 선종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지눌(知訥)의 중창 이후 선종과 교종을 통틀어 최대의 종파로 부상하였다. 조선초기에도 선종을 대표하는 위상은 유지되었지만, 억불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세종대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선종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중종대에 선교양종이 혁파되었으므로, 명종대에 일시적으로 복립된 시기를 제외하면 공식적인 불교 종파는 사라졌다. 하지만 조선시대 후기에도 불교 교단과 선교양종의 전통은 지속되었고, 근대에 들어와 조계종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파로 다시 부상하였다.

[설립 배경 및 연원]
조계종은 고려시대 후기의 선종을 대표하는 종파로, 같은 선종으로 분류된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양종을 이루었다. 고려전기의 문헌에도 ‘조계’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慧能)이 조계산(曹溪山)에 주석했던 데서 비롯하여 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11세기 후반 대각(大覺) 국사(國師) 의천(義天) 당시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아울러 이르는 선적종(禪寂宗)이 선종의 일반적인 명칭이었고, 교종은 계율(戒律)·법상(法相)·법성(法性)·원융(圓融)·열반(涅槃) 등의 오교로 대표되었다.

이후 의천이 창건한 천태종이 선종으로 분류됨에 따라 구산선문 계통의 기존 선종은 조계종으로 개칭되었다. 즉 고려시대 후기의 오교양종 가운데 오교는 그전과 마찬가지로 교종에 해당하는 계율·법상·법성·원융·열반을 의미하였고, 양종은 선종인 조계종과 천태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사료에 많이 등장한다. 1125년(고려 인종 3)에 조응(祖膺)이 조계종의 승과(僧科)인 조계선(曹溪選)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고, 1172년(고려 명종 2)에 세워진 탄연(坦然)의 비 ‘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지비(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에도 비명(碑銘)에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이는 1190년에 지눌이 수선사(修禪社)를 개창하기 이전에 이미 조계종이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내용 및 변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조계종은 선종을 대표하는 종파로서 교단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태종대인 1402년(태종 2)에는 선종과 교종에 해당하는 여러 종파들을 각각 조계종과 화엄종(華嚴宗)으로 합치고, 서울 밖의 70개 사찰을 두 종파에 분속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2년 4월 22일]. 이어 1406년(태종 6)에는 11개 종파의 242개 사찰만을 공인하고 해당 사찰의 사사전(寺社田)사사노비(寺社奴婢)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 밖의 사찰에 속한 전지와 노비는 모두 속공(屬公)하였다. 그 당시 11개 종파는 조계종을 비롯해,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법사종(法事宗)·화엄종·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총지종(摠持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 등이었다. 이때 조계종에 속한 사찰은 총지종과 합쳐 총 70개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1407년(태종 7)에는 11개 종파를 7개 종파로 축소하였다. 즉 조계종·자은종·시흥종은 그대로 유지하되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은 천태종으로, 중도종과 신인종은 중신종(中神宗)으로 통합하였다. 또 총지종과 남산종은 총남종(摠南宗)으로 합치고, 도문종은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그와 더불어 자복사(資福寺) 88개를 산중의 명찰(名刹)로 대체하였다. 조계종의 경우에는 양주(梁州) 통도사(通度寺), 송생 쌍암사(雙巖寺), 창녕 연화사(蓮花寺), 지평 보리갑사(菩提岬寺), 의성 빙산사(氷山寺), 영주 정각사(鼎覺寺), 언양 석남사(石南寺), 의흥 인각사(麟角寺), 장흥 가지사(迦智寺), 낙안 징광사(澄光寺), 곡성 동리사(桐裏寺), 감음 영각사(靈覺寺), 군위 법주사(法住寺), 기천 정림사(淨林寺), 영암 도갑사(道岬寺), 영춘 덕천사(德泉寺), 남양 홍법사(弘法寺), 인동 가림사(嘉林寺), 산음 지곡사(地谷寺), 옥천 지륵사(智勒寺), 탐진 만덕사(萬德寺), 청양 장곡사(長谷寺), 직산 천흥사(天興寺), 안성 석남사(石南寺) 등 24개 사찰이 새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이후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는 7개 종파를 다시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였다. 조계종은 천태종·총남종과 함께 선종으로 편입되었고,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은 교종에 포함되었다. 이때 고려시대 이래로 승려의 인사 문제와 불교 교단 관리를 주관하던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그 대신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를 각각 서울의 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에 설치하였다. 그 당시 선종과 교종은 각각 18개씩, 총 36개의 사찰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았는데,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으로 총 3,750명이었으며, 사전(寺田)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합계 7,900여 결이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로써 공인된 종파로서의 조계종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선교양종의 선종은『전등록(傳燈錄)』과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승과(僧科)의 교재로 하였고, 후대에도 선종 승려는 ‘조계종의 후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조계종이라는 종명(宗名)은 근대에 다시 등장하여, 1941년부터 한국 불교 전체를 대표하는 종단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62년에는 통합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지비(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김갑주, 『조선시대사원경제연구』, 동화출판, 1983.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김영수, 「오교양종에 대하여」, 『진단학보』8, 1937.
■ 김영태, 「오교구산에 대하여」, 『불교학보』16, 1979.
■ 김용태, 「조선전기 억불정책의 전개와 사원경제의 변화상」,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 [집필자] 김용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