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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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佛敎)

서지사항
항목명불교(佛敎)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선교양종(禪敎兩宗)
관련어교종(敎宗), 선종(禪宗), 오교양종(五敎兩宗), 숭유억불(崇儒抑佛), 의승군(義僧軍), 승역(僧役), 도총섭(都摠攝), 총섭(摠攝), 사찰계(寺刹契), 간화선(看話禪), 도승법(度僧法), 승과(僧科)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종지로 하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사유와 가치, 신앙과 문화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이자 종교.

[개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의 시대였고, 불교는 한국인의 사상과 심성, 세계관과 윤리, 신앙과 실천 수행, 문화와 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은 억불 정책을 시행하였고, 불교는 이전에 누렸던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불교 전통의 생명력은 조선시대에도 끊임없이 유지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는 기본적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표방한 시대였지만, 불교를 대하는 정책의 방향과 기조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었다. 먼저 태종과 세종대에는 불교 종파를 축소하고, 비대해진 사찰의 경제 기반 상당수를 환수하는 억불 정책이 단행되었다. 그에 따라 1424년(세종 6)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가 구축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성종 연간에는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양종의 존재와 도승법(度僧法), 승과(僧科)의 시행 등이 법제적으로 보장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대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던 승과가 중단되었고, 1512년(중종 7)에는 선교양종이 혁파되었다. 이어 1516년(중종 11)에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불교 관련 조항들이 삭제되어, 불교는 법제적인 폐지 상태가 되었다. 다만 명종대인 1550년(명종 5)에서 1556년(명종 11)까지 약 16년간 선교양종이 재건되고, 도승법과 승과가 일시적으로나마 다시 시행되면서 이후 승려의 인적 계승이 가능해졌다.

유교 정치가 안정을 되찾은 선조대에는 기본적으로 불교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를 취하였는데[『선조실록』 4년 3월 6일],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승려들이 의승군(義僧軍) 활동을 펼친 덕분에 불교는 그 존립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승려들이 충의의 공적을 세움에 따라 그간 제기되었던 윤리적 비판을 잠재울 수 있었고,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제고되었다. 17세기 이후의 불교 정책은 국역(國役) 체계 안에 승역(僧役)을 편제하고, 승려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승려의 자격과 활동이 국가로부터 용인을 받았고, 호적(戶籍)에 승려 호구(戶口)가 등재되었다. 또 조직화된 승군의 효율적인 관리와 통솔을 위해 도총섭(都摠攝), 총섭(摠攝) 등의 승직이 제수되었는데,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팔도도총섭이나 사고(史庫)를 수호하는 총섭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17세기에는 교단을 정비하려는 불교계 내의 노력도 이어졌다. 사원경제의 측면에서는 승려 사유지의 존재와 상속이 법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소유 토지의 확대와 사찰계(寺刹契) 등의 운영을 통해 사찰의 재정 기반이 확대되었다. 또 선종의 법맥을 매개로 한 계파와 문파가 성립되었으며,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대내외에 표방한 임제태고법통(臨濟太古法統)이 정립되었다. 그와 함께 ‘간화선(看話禪) 우위의 선교겸수’를 요체로 하는 수행 방안이 정비되고 승려의 교육 과정이 체계화되었으며, 선(禪)·교(敎)·염불을 함께 수학하는 삼문(三門) 체제가 완비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강원(講院)에서의 강학 교육이 활성화되고 사기(私記) 같은 불교 주석서가 저술되는 등 화엄(華嚴) 교학을 중심으로 한 교학이 전성기를 누렸다. 한편 왕실과 민간 차원에서, 현세의 안정과 내세의 복락을 기원하는 불교 신앙의 전통 또한 강고하게 이어졌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기본 인식은, 윤리를 어지럽히고 정교(政敎)를 손상시키며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는 대표적인 이단(異端)이라고 보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불교가 청정과욕(淸淨寡慾)의 자세나 마음의 수양, 실천 수행의 측면 등에 장점이 있다고 보았고[『태조실록』 1년 7월 20일], 또 유학자와 승려의 개인적인 교류나 시문을 통한 교유는 전 시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러나 유교 우위의 불교관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 후기에 나타난 불교 인식과 불교 정책에는 시기별로 각각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막대한 기득권을 유지해 온 불교에 대한 적대적 비판과 함께 강력한 억불 정책이 추진되었다[『태종실록』 1년 윤3월 22일]. 그에 비해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성리학적 질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면서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나 배척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는 불교를 국가의 공적 시스템 속에서 활용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불교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나 정파별 입장 차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19세기에는 서학(西學)이 국체를 뒤흔드는 대표적인 사교(邪敎)로 지목됨에 따라, 불교는 유교와 더불어 한국적 전통의 일부로서 지분을 가질 수 있었다[『순조실록』 1년 2월 5일].

[참고문헌]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 [집필자] 김용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