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왕조실록』에서 입선(入選)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시험에 합격하여 뽑힌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으로 선발되거나[『중종실록』 5년 11월 21일] 문과 초시를 통과하는 것을[『숙종실록』 25년 4월 26일] 입선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승과에 합격하는 것이[『태종실록』 14년 7월 4일]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승계(僧階)를 나타내는 말로, 승려의 문도(門徒)를 승계의 고하에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나열할 때 입선은 선사(禪師) 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아래에 위치하였다.
[변천]
불교 자료에서 입선이라는 용어는 1180년(고려 명종 10)에 조성된 영국사 원각국사비(寧國寺 圓覺國師碑) 뒷면에 기록된 문도의 직명(職名)과, 1188년(고려 명종 18)에 작성된 「용문사중수기(龍門寺重修記)」 음기(陰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명단에 등장한다. 원각국사비에는 선사-삼중대사-중대사(重大師)-입선학도(入選學徒)의 순서로, 「용문사중수기」에는 중대사-입선-참학(參學)의 순서로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인각사 보각국존정조탑비(麟角寺 普覺國尊靜照塔碑)이다. 이 비석은 일연(一然)이 입적한 지 6년이 지난 1295년(고려 충렬왕 21)에 왕명으로 일연의 하산소(下山所)인 인각사에 세워졌는데, 이 비석의 뒷면에 기록된 제자 명단에도 입선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대선사(大禪師)-선사-수좌(首座)-산림(山林)-삼중(三重)-대선(大選)-입선-참학의 순서로 문도가 나열되어 있다.
고려시대 문헌에서 대선은 종선(宗選) 즉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실시하던 과거인 선종선(禪宗選)과 교종선(敎宗選)을 통과한 뒤에 치르는 승과(僧科) 본과를 의미하는데, 대선에 나아갔다고 하면 곧 승과에 급제했다는 뜻이다. 인각사비에 기록된 입선은 대선 아래에 있으므로, 승과 본과 이전에 치르는 종선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각국사비의 입선학도나 「용문사중수기」의 입선 역시 종선에 합격한 승려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고려후기에는 승계가 변동되면서 승과를 의미하는 용어인 대선과 입선이 승계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한동안 사용되지 않던 승계인 대덕(大德)이 중덕(中德)과 다시 사용되었고, 그 대신 중대사와 대사 같은 승계는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초기까지 이어져 승과 본과 즉 선시(選試)에 합격하면 대선에 제수되고 뒤이어 중덕으로 승차하는 승계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성종실록』 9년 8월 4일].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대선의 예비 시험인 종선에 합격하는 것을 입선이라 한 데 비해, 조선시대에는 예비 시험에 해당하는 초선(抄選)을 통과한 뒤 승과 본과에 합격하는 것을 입선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입선은 조선시대에도 승과가 설행되는 동안에는 승과 합격자에 내려 주는 승계, 또는 승과에 합격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405년(태종 5)에 자초(自超)가 입적한 뒤 비석을 세우고 법호를 내리는 등의 일을 논의할 때 그의 문도를 나열하며 선사-입선의 순서로 언급한 것이 전자의 예에 해당한다[『태종실록』 5년 9월 20일]. 그런가 하면 1414년(태종 14)에 승과 시행에 대해 논의할 때, 선종과 교종의 초선에서 30명 이하를 선발한 뒤 입선에서 그 중 1/3만을 취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때의 입선이 후자의 예에 해당한다[『태종실록』 14년 7월 4일].
[참고문헌]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上
■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
■ 정병삼, 「일연선사비의 복원과 고려 승려 비문의 문도 구성」, 『한국사연구』133,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