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대선사(大禪師)는 고려시대 이래로 선종 승려에게 공식적으로 제수되는 최고의 승계(僧階)였다. 고려말기에는 대선사 앞에 수식어가 붙은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도대선사(都大禪師) 등의 새로운 명칭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대선사가 최고 승계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 정책에 따라 공식적인 승정(僧政)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지만, 고승으로 추앙받는 인물은 관례적으로 대선사로 불렸다.
[담당 직무]
고려시대부터 조선 태조대에 이르기까지 왕사(王師) 또는 국사(國師)는, 교종의 최고 승계인 승통(僧統)이나 선종의 최고 승계인 대선사의 승계를 지닌 승려 중에서 임명하였다. 또한 사찰의 규모에 따라 주지로 파견하는 승려의 승계가 달랐는데, 대선사는 각 종파를 대표하는 사찰이나 국가적으로 중시하는 규모가 큰 사찰, 비보사찰(裨補寺刹) 등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한편 대선사와 승통은 조선시대에 왕사 및 국사 제도가 폐지된 뒤에도 각 종파를 이끄는 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
[내용과 변천]
고려시대에 승과(僧科)가 실시되고 그에 따라 승계와 승직(僧職)을 제수하는 일련의 승정 체계가 정비되면서, 선종과 교종으로 나누어 승계를 수여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승과에 합격하면 처음으로 대덕(大德)의 승계를 받았고, 이후 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의 순서로 승차하였다. 그 뒤 선종의 경우에는 선사(禪師)를 거쳐 대선사로 승진하였고, 교종은 수좌(首座)를 거쳐 승통이 되었다. 승계를 제수할 때는 간관(諫官)의 서경(署經)을 거쳐 왕이 고신(告身)이라는 일종의 임명장을 내려 주었는데, 이는 일반 관원의 경우와 동일하였다. 또한 『고려사』에 따르면, 각각의 승계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별사전(別賜田)을 지급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승계가 있는 승려는 관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전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1477년(성종 8)에 대선사였던 손한우(孫旱雨)가 환속(還俗)한 뒤 벼슬을 내려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둘러싼 논의가 있었다. 그는 세종 때의 『경제육전(經濟六典)』에, 환속한 사람 중 벼슬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계(家系)와 능력을 살펴본 뒤 승직에 준하여 서용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이를 근거로 제시하였다. 이때 예조에서 올린 관문(關文)을 통해 조선전기의 대선사는 동서반(東西班) 4품에 준하는 승계였음을 알 수 있다[『성종실록』 8년 1월 20일]. 그런데 고려말기에 선사 또는 중덕(中德) 정도의 승계를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조견(趙狷)은 환속할 때 좌윤(左尹)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좌윤이 종3품이었으므로, 대선사는 적어도 정3품 이상의 관계(官階)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수좌와 승통, 선사와 대선사는 그 임명 절차와 대우 등이 재상과 동등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말기에는 대선사보다 낮은 승계가 종3품에 해당하였으나, 조선전기에 대선사가 4품에 준하는 승계로 조정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에 시행된 배불(排佛) 정책 때문이었다.
조선전기 선교양종 체제에서 대선사는 기본적으로는 관교(官敎)를 수여하는 방식, 즉 왕이 승계를 제수하는 방식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처럼 승과를 거쳐 대덕에서부터 연차와 명망을 쌓아 차례로 승차해야만 대선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관청 건물이나 다리를 세운 공으로 선사나 대선사에 제수되기도 하였고[『세종실록』 11년 8월 7일], 진관사(津寬寺)의 수륙사(水陸社) 공사에 참여한 대가로 대선사에 제수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4월 29일]. 또 성종 연간에는 대사헌 손순효가 경연에서, 도첩이 있는 50세 이하의 승려를 찾아내 한 달 동안 부역을 시키고, 그 대가로 선사나 대선사의 직첩을 주어 군역에 보충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4년 8월 21일]. 이처럼 조선시대에 대선사는 고승에게 제수되는 승계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