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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승통(僧統)은 중국의 북위~당나라 때 처음 생겨난 승직(僧職)으로, 가장 높은 승관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승통이라는 용어가 쓰여졌는데, 승정(僧政) 전체를 관장하는 최고위 승관인 국통(國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계(僧階)로 정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승직으로 설치되었다.
[유래]
승통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승관(僧官) 제도가 시작된 북위(北魏)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최고 승관을 가리키는 명칭은 사문통(沙門統)·도문통(道門統)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대개 승통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최고 승관을 승통이라 부른 것은 당나라 때부터이다. 당나라에서는 지방 주(州)·군(郡)의 승관을 통솔하는 가장 높은 직책으로 승통을 두었고, 중앙에는 양가승통(兩街僧統)을 두었다.
9세기 신라에서는 중앙 승관인 군승통(郡僧統)이나 주통(州統) 등을 지방에 파견하여, 승려들에게 왕명을 전달하거나 집행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신라말기와 고려초기의 금석문에 등장하는 승총(僧摠)은 승통과 같은 표기로 볼 수 있다.
고려초기에 승통은 승계 안에 포함되기 시작하였고, 광종대에는 승록사(僧錄司)의 관원인 양가승총(兩街僧摠)이 자료에서 확인된다. 고려에서의 승통은 고려전기 승록사 관원인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과 교종의 최고위 승계인 승통으로 나뉘어 정비되었다.
[내용 및 변천]
고려시대의 승직 체제는 조선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종 연간인 1512년(중종 7)에 선교양종(禪敎兩宗) 체제가 혁파됨에 따라 승통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명종 대에 양종이 재건되면서 승정이 다시 실시되었고, 선조 연간에 임진왜란을 계기로 승통이 복설되었다. 임란 당시 의주로 몽진을 간 선조는 승통을 설치하고[『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휴정(休靜)을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에 임명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고 통솔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승통은 지속적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1703년(숙종 29)에는 도별로 지역 단위의 승려 감찰 기구인 규정소(糾正所)를 두어, 승려들을 규정하고 교단을 통솔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이때 옥룡사(玉龍寺)를 전라도의 좌규정소(左糾正所)로, 금산사(金山寺)를 우규정소(右糾正所)로 지정하고, 사리탑(舍利塔)이 있던 금산사에는 수호승통(守護僧統)을 두었다고 한다. 전라도의 좌우 규정소가 혁파된 뒤에는 해남 표충사(表忠祠)의 승통이 규정소의 일을 맡아보았다.
정조대에는 광주의 봉은사(奉恩寺), 양주 봉선사(奉先寺), 남한산성 안의 개운사(開運寺), 북한산성 안의 중흥사(重興寺)와 수원의 용주사(龍珠寺)에 규정소를 두고 전국의 승풍을 규정하는 직책을 맡게 하였다. 이들 5개 규정소에는 각각 관할 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이밖에 석왕사(釋王寺)에 승통과 총섭, 동화사(桐華寺)에 봉산수호총섭(封山守護摠攝)과 승풍규정도승통(僧風糾正都僧統), 대둔사(大芚寺)에 팔도선교십육종규정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糾正都摠攝)과 팔도승풍규정도승통 등을 두었다.
19세기에는 사찰에서 임의로 승직을 남발하면서 원래의 직책이 가지고 있던 권위가 상실되기 시작했고, 교단 통솔 및 통합이라는 본연의 기능은 약화되고 사찰들 간의 세력 다툼을 불러일으켰다. 규모가 큰 사찰의 경우에는 주지의 상급 직책으로 승통을 두고 그 위에 다시 총섭을 두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승단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1859년(철종 10)에는 승려들이 대둔사(大芚寺) 표충사(表忠祠)에 모여 승통제의 말폐를 논의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