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의 사역원은 사대교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외국어를 교육하는 교육기관의 기능, 외국어 통번역 등을 맡아보는 일반 관청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사역원은 이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역관을 양성하였다. 역관이 되려면 사역원 생도가 되어야 했다. 까다로운 입학 과정과 엄격한 교육을 거쳐야 했으며, 교육이 끝난 후에는 역과에 합격해야 역관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훈련을 받은 역관 중에 우두머리가 수역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수역이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사역원을 설치하여 교육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관 선발 시험은 잡과에 포함되었고, 이때 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 이를 수역으로 지정하여 나머지 역관을 지휘하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관은 중국·왜(일본)·몽골·여진과의 외교에서 주로 통역 업무를 맡았다. 이들은 사행을 따라가 통역하거나 외국 사신이 방문하였을 때 통역을 맡아 외교의 실무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직 및 역할]
역관의 외교적 실무라고 할 수 있는 사행 수행과 사신 접대의 2가지 역할에서 수역이 주목되었다. 조선후기의 사절단은 청나라를 왕래하는 연행사와 일본을 다녀오는 통신사로 나눌 수 있다. 1645년(인조 23) 조선과 청국 사이에 정한 사행의 정관(正官)은 사(使) 2명 혹은 1명, 서장관 1명, 대통관(大通官) 3명, 압물관(押物官) 24명 등 모두 30명이었다. 통역을 맡은 대통관 중에 수역 당상관(首譯堂上官)이 1명, 그 아래의 상통사(上通事)가 2명이었다.
사절단의 정원은 주요 인사인 부사와 서장관을 확정한 다음에는 역관들을 먼저 직책의 순서에 따라 배정하고, 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화원(畵員)·군관(軍官) 등을 관직의 품계에 따라 충원하였다. 사행이 연경을 왕래할 때 공물과 인마를 직접 관장한 대통관 3명과 압물관 24명 등은 모두가 역관이었다.
사행이 귀국하면, 서장관은 사행 중에 보고 들은 견문록(見聞錄)을 작성해 왕에게 보고하였다. 역관 중의 우두머리인 수역도 문건으로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관은 사절단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수역은 이들을 총지휘하는 존재였다.
[변천]
조선후기에 들어 역관은 연경을 왕래하면서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시에 사절단은 대상(隊商) 행렬로 바뀌어 갔다. 이 과정에서 역관은 부를 축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월권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사절단의 활동이 시원찮은 경우에는 정사와 함께 징계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수역에 관한 많은 기사는 수역의 처벌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1894년(고종 32) 갑오개혁으로 사역원과 역과가 폐지되면서 역관도 더 이상 배출되지 않았다. 동시에 수역이라는 존재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