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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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행(西巡幸)

서지사항
항목명서순행(西巡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순행(巡幸)
동의어서북순행(西北巡幸)
관련어남순행(南巡幸), 순종(純宗),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평양행궁(平壤 行宮), 행재소(行在所), 행행(行幸)
분야왕실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909년(융희 3) 1월 말~2월 초 순종황제가 평양을 비롯한 서북 지방을 순행한 일.

[개설]
1909년 1월 27일~2월 3일 동안 순종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양서 지방을 순행하였다. 이는 1909년 1월 초에 대구, 부산, 마산 등을 순행한 남순행(南巡幸)에 이은 두 번째 순행이었다.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7년(융희 1) 새 황제에 등극한 순종이 대한제국민들에게 황제로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자 순종을 순행하게 하여 대중에 노출시킴으로써 황제로서의 인식을 공고히 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배종하여 통감부(統監府)의 힘을 과시하였다.

[연원 및 변천]
순종의 서순행은 1월 7일부터 13일까지 이루어진 남순행에 이은 행차였다. 이러한 순종의 순행은 역대 왕이 도성 내의 종묘나, 도성 주변 선왕의 능에 행차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바로 일본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순행을 본뜬 것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명치유신 직후인 1868년(일본 명치 1)부터 20년간 6차례에 걸쳐 일본 각지를 순행하였으며, 이러한 순행은 신격화되어 있는 천황을 대중 앞에 드러냄으로써 유신 직후 불안한 일본 정세를 가라앉히고 천황을 중심으로 국가 구성원들의 통합과 자주적 국민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순종의 순행은 메이지 천황의 순행과도 다른 것이었다. 순행을 계획한 주체가 순종 자신이 아니라 통감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통감부였다. 이 순행은 당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통감정치에 대한 한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달래고, 대한제국 황제의 건재함을 보여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절차 및 내용]
서순행은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간 이루어졌으며 도시 간의 이동은 특별 궁정열차를 이용하였다. 1월 27일 순종은 오전 8시에 남대문역을 출발해서 평양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은 뒤, 다음 날 정주를 거쳐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29일에 신의주에서 의주로 이동하여 머물었으며, 30일에는 다시 신의주로 돌아와 머물렀다. 31일에는 정주에서 잠시 정차하였다가 평양에 도착하였다. 31일과 2월 1일에 평양에 머물렀으며 2월 2일 평양을 출발하여 황주에서 잠시 정차하였다가 개성에 도착하였다. 2월 3일 개성을 출발하여 오후 3시에 남대문역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순종의 서순행에는 궁내부(宮內府), 내각(內閣), 통감부의 3개 부처에서 279명이 선발되어 호종하였다. 호종원 가운데에는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 궁내부 대신(大臣) 민병석(閔丙奭), 시종원(侍從院) 경(卿) 윤덕영(尹德榮), 내각 총리대신(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내부(內部) 대신 송병준(宋秉畯), 군부(軍部) 대신 이병무(李秉武), 학부(學部) 대신 이재곤(李載崐) 등 궁내부에서 201명, 내각에서 49명이 호종하였다. 일본인으로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궁내부 차관(次官) 고미야 사보마쓰[小宮三保松], 내장원(內藏院) 이사(理事)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 대한의원(大韓醫院) 의관(醫官) 겸 전의(典醫) 스즈키 겐노스케[鈴木兼之助] 등 29인이 호종하였다[『순종실록』 2년 1월 21일].

서순행에서는 순종의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모든 절차가 철저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 지방 역에 열차가 도착하면 노부식을 먼저 설치한 후 순종을 모셨다. 순종이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음악대가 먼저 하차하여 음악을 연주하였으며, 순종이 기차에 오를 때에는 오르기 전에 음악대가 먼저 탑승하여 열차 내에서 애국가를 연주하였다.

서순행에서 가장 중심 되는 것은 지방 민인들과의 만남이었다. 각 지방에서 순종을 폐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예식관이 조사하고, 차관, 대신, 통감에게 의논한 뒤에 상주하였다. 그러면 순종은 칙어를 내리거나 알현을 받아주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순종은 서순행 시 서구식 대례복인 대원수복을 착용하였으며, 머리도 단발을 갖추었다. 이러한 순종의 차림은 사람들의 단발과 양복에 거부감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순행 기간 동안 순종의 기거는 여관(女官) 5명이 종사하였으며, 의사와 이발사에 이르기까지 궁궐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직책의 인물들이 호종하였다. 순종은 열차 안과 행재소에서 조선 전통 음식과 서양식 식사를 하였는데, 식사를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는 손탁호텔에서 나온 10인의 요리사가 담당하였다.

순종의 서순행시 통감부에서는 연도에 마중 나온 민인들에게 한일 양국기를 들도록 하였는데, 이때 오산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일장기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참고문헌]
■ 『대한제국관보(大韓帝國 官報)』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황성신문(皇城新聞)』
■ 『서순행일기(西巡幸日記)』
■ 김소영, 「순종황제의 남‧서순행과 충군애국론」, 『한국사학보』39호, 2010.
■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남순행 연구」, 『정신문화연구』30권 2호, 2007.
■ 이왕무, 「대한제국기 순종의 서순행 연구 -『서순행일기』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31, 2011.

■ [집필자] 목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