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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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園幸)

서지사항
항목명원행(園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행행(行幸), 행차(行次), 거동(擧動), 친제(親祭)
관련어능행(陵幸), 온행(溫行), 행재소(行在所), 행궁(行宮), 지영(祗迎), 지송(祗送), 정리사(整理使), 유도대신(留都大臣), 수궁대장(守宮大將), 유진대장(留陣大將), 유도삼대장(留都三大將), 유영대장(留營大將), 유주대장(留駐大將), 원행의궤(園行儀軌), 궁원식례(宮園式例), 소령원(昭寧園), 현륭원(顯隆園), 휘경원(徽慶園), 수길원(綏吉園)
분야왕실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후기 국왕이 세자, 세자빈의 무덤 또는 왕이나 세자를 낳은 후궁의 무덤인 원(園)에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기 위해 행행하던 일.

[개설]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의 무덤을 능이나 원(園)이라 하였으며, 제후왕의 무덤은 원이라고 하였다. 원은 천자나 제후왕 모두가 쓸 수 있는 용어였지만 능은 오직 천자만 쓸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의 경우 대한제국 이전까지 천자를 자칭하지는 않았지만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의례 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래로부터의 관습 때문에 가능했다.

조선 시대 들어 유교의례가 강조되면서 왕, 왕비, 세자, 세자빈, 후궁, 왕자, 왕녀 사이의 위계가 강화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만 능이라고 하였고 나머지 왕족의 무덤은 일괄적으로 묘(墓)라고 하였지만 조선 후기 들어 유교의례가 더욱 강조되면서 영조 대에 세자, 세자빈 및 왕과 세자를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으로 하여 나머지 후궁, 왕자, 왕녀의 무덤인 묘와 구분하였다. 이와 함께 국왕의 원행 역시 중요한 왕실의례로 정비되었다.

[연원 및 변천]
18세기 들어서면서 조선왕실에서는 후궁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경우 왕은 자신의 생모 즉 사친을 추숭함으로써 종통(宗統)을 확립하고자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추숭이었다.

숙빈최씨(淑嬪崔氏)는 1718년(숙종 44) 3월 9일 창의동 사제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는 생모의 무덤 자리를 직접 살펴 양주 고령동 옹장리에 숙빈묘(淑嬪廟)를 조성하였다. 영조는 1725년(영조 1) 즉위 이듬해 순화방의 도성 북쪽 산기슭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였고, 숙빈묘 입구에는 거대한 신도비를 세웠다. 그리고 1744년(영조 20)에 묘호(廟號)를 육상(毓祥)으로, 묘호(墓號)를 소령(昭寧)으로 정하였고, 1753년(영조 29)에는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격상시켰다.

한편 영조는 재위 7년째인 1731년(영조 7)에 처음으로 숙빈묘를 참배한 후 수시로 숙빈묘에 참배하였다. 1731년의 숙빈묘 참배 의례는 1744년(영조 20)에 간행된 『국조속오례의』길례에 ‘배소령묘의(拜昭寧墓儀)’ 항목으로 실림으로써 조선 후기 원행의 기본 의례가 되었다.

영조 이후 정조, 순조 역시 사친을 추숭하였고 사친묘에 자주 행차하였다. 예컨대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궁원으로 경모궁과 현륭원을 조성하였고, 순조는 생모의 궁원으로 경우궁과 휘경원을 조성하였다. 이 결과 19세기에는 영조의 사친을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위시하여 추존왕 원종의 사친을 모신 저경궁(儲慶宮), 경종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모신 대빈궁(大嬪宮), 추존왕 덕종의 사친을 모신 연우궁(延祐宮), 사도세자의 사친을 모신 선희궁(宣禧宮), 순조의 사친을 모신 경우궁(景祐宮), 영친왕의 사친을 모신 덕안궁(德安宮) 등 7궁이 출현하였다.

[절차 및 내용]
조선 후기 원행의 절차나 내용은 기본적으로 능행과 같았고 다만 규모가 작았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원행이 결정되면 능행과 마찬가지로 정리사(整理使), 유도대신(留都大臣), 수궁대장(守宮大將), 유영대장(留營大將) 및 국왕의 시위 병사들을 지휘할 대장과 수행할 인원 및 도성에 남을 인원이 정해졌다. 정리사는 보통 행행에 관련된 경비 관련 업무를 총괄하였다.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영대장은 궁궐과 수도방위를 책임졌다. 호위대장은 국왕의 호위 및 행행시 국왕의 호위 병사들을 통솔하였다. 정리사, 유도대신, 수궁대장, 유영대장, 호위대장 등은 보통 국왕과 대신의 협의에 하여 선정되었다. 아울러 육조에서는 각각의 업무내용에 따라 행차에 관련된 일을 수행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 시대 국왕은 원행 중에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기도 하고 능 소재지의 민원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국왕의 능행과 관련한 격쟁(擊錚), 집단 상소 또는 과거시험 등이 자주 거행되었다. 특히 정조 재위 중 수시로 있었던 현륭원(顯隆園) 행차는 수원 행궁과 장용영 건설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신명호, 「조선후기 국왕 行幸時 국정운영체제」, 『조선시대사학보』17, 2001.
■ 김지영, 『조선후기 국왕의 행차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5.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 김덕수, 「『소령원지』의 저술 과정」, 『숙빈최씨 자료집』1-日記, 園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

■ [집필자] 신명호